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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딜레마에 빠진 이집트, 민중의 목소리는 어디로 향할까?

이집트 홍성민 중동경제연구소 소장 2013/08/21

  이집트 민중의 함성은 18일간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2011년 1월 25일 시작된 반정부시위가 예상을 뒤엎고 2월 11일 30년 철권통치를 한 무바라크 대통령을 퇴진시킨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이 성공한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이 전통음식인 ‘코사리(Koshary)’를 먹으며 투쟁했다는 의미에서 ‘코사리 혁명’으로도 불리며, 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희망의 불씨’을 넘겨주면서 ‘아랍의 봄(Arab spring)을 알렸다.


  곧바로 실시된 3월 국민투표에서 임시 개정헌법이 77.2% 찬성으로 가결되었고, 2012년 5월 선거를 통해 모하메드 무르시(Morsi)가 ‘무슬림형제단'의 후원에 힘입어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그는 곧바로 무바라크 정권 때 임명한 탄타위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같은 해 11월 22일 대통령의 권한 대폭 강화하는 ‘헌법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신헌법 선언문은 ‘현대판 파라오 헌법선언’이라는 비난과 함께 또다시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켰다. 급기야 12월 8일 헌법선언문이 폐기되었고, 12월 25일 새 헌법이 공식적인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결국 무르시 대통령의 통치는 다시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2013년 1월 25일 혁명 2주기를 맞아 무르시 반대시위가 발생하더니 6월 23일 대통령 취임 1주기에는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반정부시위로 확대되었다.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7월 1일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에게 “48시간 이내에 혼란을 해결하라.”며 최후통첩을 보냈고, 무르시가 대통령직 사임을 거부하자 7월 3일 무르시로 부터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일종의 군부 쿠데타였다.
  쿠데타 형식으로 정권이 전복된 이집트는 다시 정세 불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군부에서 권력을 빼앗아온 민중의 봉기는 다시 군부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집트의 현대사는 1919년 민중봉기이래 ‘나세르혁명’을 거치면서 ‘혁명(revolution)'으로 점철돼온 국가다. 다시 과도정부에 맡겨진 혼돈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과 군부의 갈등은 향후 이집트 앞날에 중요 변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 전체 국민의 10%를 차지하는 콥트교도들은 향후 정국에 캐스팅보트가 될 가능성이 짙다.

 

■ 이집트 소요사태의 주요 사건일지

 

2011년
- 1월 25일: 대규모 반정부시위 시작(무바라크 사퇴요구)
- 2월 11일; 술레이만 부통령 "무바라크 사퇴 및 군부에 권력 이양" 발표
2012년
- 5월 23 ~ 24일; 무바라크 퇴진 후 첫 대통령 선거
- 6월 13일; 의회, 헌법 초안 작성할 새 제헌 의회 구성
- 6월 30일: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 공식 취임
- 11월 22일: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헌법 선언문' 발표
- 12월 25일: 새 헌법 국민투표 통과 공식 발표
2013년
-  1월 25일: 혁명 2주년 기념일 무르시 반대 대규모시위
- 6월 30일: 무르시 취임 1주년 기념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
- 7월  3일:  군부, 무르시 대통령직 박탈


이집트 역사는 민중의 힘에 의해 유지돼왔다.
  30년 무바라크의 철권통치 퇴출에 불을 지핀 것은 정권의 부패에 시달린 이집트 국민의 분노였다. 이집트에서 반정부시위가 발생할 당시 대부분 분석가들은 오랜 군부통치의 역사를 들어 무바라크가 퇴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외로 빠르게 전개되었고 짧은 시간에 종결되었다. 그 이면에는 오랜 군부통치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가져온 분노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군부나 정부의 역할은 막강했지만 무바라크 정권은 부정부패와 정부무능에 대한 민심(民心)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 군부의 역할을 간과하고 정국안정을 바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 국내정치는 국제사회와도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그 이면에는 ‘석유자원 확보’라는 강대국들의 이권이 개입돼 있고, 수에즈운하가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이집트 정국의 안정을 큰 기대 속에 지켜보는 점 또한 이 점에 기인하다. 무슬림형제단이나 군부에 있어서 통치의 한계(限界)도 이 문제와 관련돼 있고, 이집트 국내정치의 안정과 국제정치와의 역학관계가 이집트 안정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기에 ‘민중의 목소리(voice of people)'는 이 점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민중의 반정부 시위가 ‘혁명(革命)'으로 이어진 것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집트의 독립도 민중이 쟁취한 성공이었고, 나세르의 수에즈 국유화(國有化)도 다름 아닌 민중의 힘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볼 때, ’코사리 혁명‘도 보다 큰 틀에서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1882년부터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영국의 위임 통치령을 선언하자 이집트 민중은 거세(擧世)는 물론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까지 요구하는 반영(反英) 시위로 까지 활동영역을 확대시켰다.


더 나아가 반영데모는 영국의 통치령 반대에 그치지 않고 영국과 결탁한 집권층과 통치자(술탄 푸아드 1세)의 무능에 까지 이어졌다. 결국 1919년 혁명은 그 다음해 영국이 이집트의 제한적 독립을 선언하게 만들었고, 푸아드 1세는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1923년 신헌법을 공포하고 입헌민주제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혁명은 1919년 이집트 혁명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무바라크의 퇴진은 나세르 군사혁명의 종결인가?
  이집트의 반영시위는 1936년 앵글로-이집트협정 체결까지 이끌어 냈다. 그렇지만 20세기 초 입헌군주제와 의회제도 도입에 따른 30년간의 자유주의 실험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28년 하산 알-반나가 창설한 무슬림형제단(MB)과 1933년 아흐마드 후세인이 세운 청년 중심의 극우단체인 ‘영 이집트(Young Egypt)'가 민심을 얻으면서 1930년대 후반부터 이집트 정국은 극우시대로 접어든다.


이집트 민중은 계속하여 앵글로-이집트 협정폐지와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였다. 1945년 당시 친영파 총리였던 아흐마드 마헤르가 암살되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1950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과 영국군간의 무력충돌은 점점 격화되고 이집트 정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가말 압둘 나세르다. 1952년 7월 나세르와 안와르 사다트 등 자유장교단이 군사혁명을 일으켜 무함마드 왕조를 무너뜨리며 혁명은 계속된다. 아스완 댐 건설을 꿈꾸던 나세르는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서방에 융자신청을 했지만 소련제 무기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서방국가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때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명연설,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17배나 많은 양의 돌을 필요로 하지만, 아스완 댐은 이집트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로 나세르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나세르의 ‘수에즈 국유화’는 제2차 ‘중동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이집트인들로서는 자긍심을 갖게 된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대패함으로써 사다트정권은 민중의 따돌림을 받게 된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무바라크는 1975년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이 되었고, 1979년 집권당 국민민주당(NDP)의 부의장이 되었다. 아랍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던 사다트가 1981년 10월 이슬람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30년 동안 그 직을 유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2011년 민중봉기는 1952년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이 일으킨 군사혁명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무르시의 퇴진 또한 군사쿠데타의 일종으로 볼 수 있어 이집트는 ‘과거와 현재의 혼돈’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늪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시험대에 오른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과 이집트 과도정부
  안와르 사다트대통령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고 무슬림형제단의 지지를 받은 무르시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지만, 다시 군중의 힘에 의해 군부가 재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과연 이집트 국민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 점이 향후 혼란에 빠진 이집트 정국을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하산 알 반나에 의해 창설된 이슬람 부흥운동단체이다. 이슬람근본주의를 주장하는 이 단체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알제리, 튀니지, 요르단, 수단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80년 이상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법, 샤리아가 지배하는 국가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1954년 가말 압둘 나세르의 암살기도 사건이후 불법단체로 규정돼왔다.


  2005년 총선에서 하원의석의 20%를 차지하며 정치에 뛰어든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혁명을 계기로 ‘자유정의당’을 창당하여 공개적으로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무슬림형제단은 학교, 병원, 공장 등 서민들을 위한 복지, 생계지원시설 등을 운영하며 주로 노동자 농민과 도시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회원 100만명의 단체다.
  무슬림형제단은 다원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1979년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조약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 온건 이슬람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 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무르시 퇴진이후, 사우디와 UAE가 이집트 과도정부에 80억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경제지원을 약속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무르시 퇴진이후,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의 ‘쿠데타 반대연합’의 저항과 아들리 만수르 임시 대통령의 과도정부의 강경진압의 대치상황으로 정국은 다시 혼돈속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미국과 유럽, 중동국가들의 특사에 이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무르시의 석방을 촉구하고 이집트 군부에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고 있다.
  이집트 정국의 과제는 원만한 민정이양과 그에 입각한 민주화의 달성이다. 다만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집트 민중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 선택은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10.26이후 한국의 민주화과정도 하나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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