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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정보

[역사]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이집트 국내연구자료 학술논문 정병준 역사비평 발간일 : 2014-05-31 등록일 : 2018-06-15 원문링크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고 카이로선언에 한국조항이 들어가게 된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국 정부와 장개석은 카이로회담을 준비하면서 카이로선언에 포함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는 항목을 주요한 전시 정치의제로 미국에 제시할 결심이었다. 1943년 11월 23일 루즈벨트∙장개석의 만찬회동에서 중국은 ‘한국의 자유 독립’ 조항을 강조했으며, 미국은 그것을 중국의 야심으로 판단했지만 결국 카이로선언에 삽입했다. 미국은 1943년 11월 24일 해리 홉킨스가 카이로선언 초안을 작성했고, 여기에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조항이 들어갔다. 같은 날 루즈벨트대통령은 앞부분을 ‘적절한 시기에’로 변경했다. 중국측은 미국초안에 찬성했고, 영국의 캐도건외무차관은 카이로선언에 한국조항 삽입을 반대했다. 11월 26일 처칠수상은 영국의 수정초안을 제시했고, 여기서 한국조항은 가급적 모호하고 불명확한 용어로 수정되었다. 11월 26일 영국의 수정초안에 기초해 한국조항이 포함된 카이로선언이 결정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을 수행하는 일반적∙포괄적 원칙으로서 한국 독립에는 찬성했지만, 대한정책의 기축은 다자간 국제신탁통치 실시였으며, 이는 카이로선언에 ‘적절한 시기’로 표현되었다. 미국, 중국, 영국은 각자 다른 입장과 대한정책을 추구했고, 카이로회담에서 논의와 의견대립, 대타협을 거쳐서 카이로선언에 한국조항을 확정했다. 전체적인 기조에서 카이로선언은 미국이 추구하던 일반론적인 대한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한편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을 제지하는 ‘합의에 의한 공동정책’을 추구한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은 미국, 영국, 중국 3국이 도달한 외교적 타협의 산물이었으며, 그에 대한 해석은 각국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문맥을 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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