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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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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김영진 소속/직책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2017-02-09

최근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 배치 문제를 둘러싸고 한중간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각종 재제조치들은 매우 대국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춰지고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 문제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 나아가 국제질서의 변화와 관련된다. 국제정치이론가들이 미국에서 중국으로의 세력전이(power transition)와 그에 따른 파스 시니카(Pax Sinica)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지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이미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지면관계로 각각의 개념들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충분히 지적할 수는 없다. 다만 전통 동아시아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국제질서는 전통동아시아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동아시아는 과거처럼 외부세계에 닫혀있지 않으며 상위 국제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 동아시아와 관련하여 우리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하나가 소위 조공체제(tribute system)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 국가들 사이에 합의된 개념은 아니며, 후대에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 페어뱅크(J. Fairbank)는 문헌들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해당 개념을 맨 처음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그 내용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는 주변국들이 황제에게 조공(朝貢)을 바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중국 중심의 위계질서가 지배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질서는 평화로웠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가 1941년 위 개념을 제기했을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기존의 국제질서에 도전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공체제 개념은 중국의 역사적 위상과 역할을 부각시키고 일본을 견제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해에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미소간 냉전이 고조된 시점에서 친중의 대표적 지식인으로서 페어뱅크는 조공체제를 더 체계화하여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라고 명명했다.

 

조공체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 책봉(冊封) 개념이다. 이 개념은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역사학자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교수가 ‘동아시아세계’라는 단일한 질서를 설정하면서 제시되었다. 다만 그는 일본은 기본적으로 그 질서에 속해있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질서를 중국과 일본의 양대 관계로 설정하고자 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사실 조공이나 책봉 그리고 양자를 결합한 조공책봉의 개념들은 역사적 문헌들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국가 간 질서를 나타내는 대표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의식적 행위이다. 영국의 사절 메카트니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엎드려 절하도록 요구받은 것은 확실히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특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공이나 책봉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역동적인 권력관계에서 존재했던 하나의 형식이나 절차에 불과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조공체제나 책봉체제 개념은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자체의 독특한 목적과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최근 중국 내에서는 각종 공정의 이름으로 대규모 역사재구성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면서 매우 적극적인 연구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 관련 담론이 모두 국가에 의해 주도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에 반대되는 견해는 제시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 자신의 부상과 더불어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중국내 논의는 어떠한가.

 

조공체제 이외에도 중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번속(藩屬)체제일 것이다. 번(藩)은 원래 울타리를 의미하는데, 주로 중국을 그 너머의 적들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나라를 지칭한다. 이를테면 조선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해서 동번(東藩)으로 불리었고, 청시기에 지금의 신강 위구르 지역이나 티베트, 몽골 등은 번부(藩部)로 불리었다. 속(屬)은 속국(屬國)이나 속지(屬地)를 뜻한다. 번속체제 개념은 주변 국가들을 자국의 방어나 안보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조공체제가 경제적 관계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질서를 내포한다면 번속체제는 더 국제정치적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개념들은 역사기술 자체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의 학자들은 전통질서를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대안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최근 중국의 부상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은 책의 하나가 영국의 언론인 마틴 자크(Martin Jacques)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일 것이다. 거기에서 저자는 중국은 미국과 달리 패권 자체를 추구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주변 국가들과 공존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유력한 논리적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중국은 조공체제를 통해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했다는 페어뱅크의 아이디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마틴 자크에 의하면 전통 동아시아가 위계적이었지만, 자율성과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것은 단지 법적으로 평등한 국가들 사이의 경쟁과 그에 따른 무정부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서구적 국제질서와 대조된다. 중국의 부상은 서구식의 제국주의 팽창이나 식민지배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평화로울 수 있다고 간주된다.

 

조공체제 개념과 그 정책적 함의는 한국 내에서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적잖게 수용되는 듯 하다. 여기서 중국에 대한 견제나 미국과의 동맹보다는 중국의 우월적 지위에 편승하는 전략(bandwagoning)이 선호된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다는 소위 중국위협론에 상반되는 관점에서 중국의 패권적 지위가 동아시아에 안정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국제정치이론에서 말하는 바, 패권국가의 존재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른바 패권안정론(hegemony stability theory)이 그것이다.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논의는 중국에서도 매우 활발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자오팅양(赵汀阳) 교수의 소위 천하체계(天下體系)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천하체계는 기원전 10세기 경 주(周)의 봉건제에서 구현되었는데, 천자와 제후의 관계에서처럼 분권과 통일을 조화롭게 결합한 질서이다. 천자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들에 대한 조정을, 제후는 내정에 대한 고도의 자치권을 갖는다. 그것은 천하의 공유를 의미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나 국가간 협력을 강조하는 “협화만방(協和萬邦)”과 같은 일견 보편주의적 개념들과 결합된다.

 

해당 개념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인지 와는 무관하게 대부분 실천적・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들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중국에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페어뱅크가 서구 중심적 단순화의 오류를 범한 것처럼 자오팅양의 경우에도 새로운 패권을 위한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비켜나기 힘들다.

 

여기서 지면관계로 각각의 개념들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충분히 지적할 수는 없다. 다만 전통 동아시아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국제질서는 전통동아시아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동아시아는 과거처럼 외부세계에 닫혀있지 않으며 상위 국제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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