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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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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중국 VS. 한국-중국’ 지정학의 비교로 살펴 본 미-중 갈등 대응

정혜영 소속/직책 : 건국대학교 중국연구원 학술연구교수 2020-05-28

오늘날 아시아 국가들이 직면한 국제정치적 문제는 이웃한 중국의 부상과 패권 정치 영향력 확대 및 미-중 갈등으로 인한 강대국 충돌의 영향력에서부터 안전하고 발전적인 국가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국제정치 갈등의 중심, 국제무역 환경의 악화, COVID-19 방역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3중고에 북핵 문제로부터 안정을 기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존재한다. 아래에서는 한국과 베트남이 지닌 지정학 차이를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미-중 갈등에 대응하는 지정학적 전략 패러다임 방향을 논해보고자 한다.

지정학 차이1)
베트남과 중국은 ‘남중국해 영해 분쟁’이라는 뿌리깊은 갈등이 존재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이라는 대국을 이웃으로 하고 있으면서 역사 이래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여 유교 문화권을 이루었다. 바다를 접한 국가로서 식민지 개척시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충돌의 요충지, 냉전시기 국 가이념의 국제적 충돌지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발발도 같은 역사적 배경과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의 주변 국제환경은 명확한 차이가 존재한다. 최근 깊어진 베트남과 중국의 남중국해 해양 영토 분쟁은 양국의 관계 규명을 명확히 해준다. 로버트 캐플런(Robert Kaplan)은 지정학을 ‘국가가 전략을 세울 때 마주하게 되는 전체적 맥락에 대한 연구이며, 그 지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대립적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라고 정의 내렸는데, 남중국해 지정학은 중국과 베트남이 영해에 대한 권력 경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양국을 뿌리 깊은 ‘대립자와 경쟁자’로 규명되도록 한다. 따라서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양국 사이의 군사전략과 외교전략의 행동은 양국을 지속적으로 대립의 관계로 이끌고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중국의 해양 출로 확보는 남중국해 해양 분쟁이라는 핵심과제를 풀어야 한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해주권을 놓고, 과거 프랑스, 일본과 지속적인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 하고 있었던 시기, 중국은 영해 관리와 개발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해양강국 프랑스의 지배력에 의해 통킹만(북부만)의 62%를 프랑스령 베트남에 양보(프랑스-청나라 조약에 의해 중국은 38% 북부만 영해 귀속권 만을 인정함)해야 했다.1) 또한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프랑스와 일본이 세력다툼을 하던 1907년-1956년 까지, 파라셀(황사군도)과 스프래틀리(남사군도)의 점령과 주변관할 해역문제를 두고 프랑스와 일본을 상대로 무력충돌을 하였다. 하노이 공산당 정부가 베트남 북부와 남부를 통일하고, 황사군도와 남사군도의 지배권을 강화하자, 중국은 베트남과 군사적 충돌을 거쳐 지금의 남중국해 섬들을 장악했다.2) 오랜 양국의 남중국해 갈등은 이렇게 역사적 뿌리가 깊은 갈등이다. 미국은 현재, 항행의 자유 차원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개입하고 있을 뿐, 중국과 베트남 영유권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과 육상협력 기조유지와 해상갈등이라는 대중(中) 안보딜레마에 놓여있는데, 이에 대한 베트남의 선택은 일본과 미국 등 세계정치경제의 다자 협력방향으로 더욱 나아는 것이다. 중국이 국경을 접한 이웃국가들과 역사공정 작업을 벌이고 있어, 그 부정적 영향과 파급은 한국에도 존재하지만, 한반도는 중국과 심각한 영토분쟁의 문제들이 수면위로 올라와 있지 않아 중국과의 갈등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협력 및 갈등 문제에는 북한 이라는 분단 변수가 연동되어 있다. 현재로써 중국은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를 잃어버릴 경우 해양세력의 위험을 직접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을 쉽게 다루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한 긴밀한 관계유지가 필요하며, 부상한 중국 패권의 영향력으로 볼 때, 대북 영향력은 과거보다 커질 수 있다. 향후 미-중 갈등이 더욱 첨예화 된다면 중국은 오히려 한국에게 우호적인 협력을 약속하면서 한국에게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한반도가 해양세력의 세력균형과 완충역할을 해 줄 것을 요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정학 차이 2)
베트남 주변국의 지정학과 한반도 주변국의 지정학을 비교하자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중국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제공한다.

중국에게 있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지정학이 베트남 보다 큰 어려움을 제공하는 요인은 중국이 상대해야 하는 국가들이 모두 미국,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근대시대 해양세력과 육지세력의 한반도 충돌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중국과 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영국의 암묵 하 한반도를 지배했다. 냉전시기 미국과 중국의 세력충돌 끝은 휴전과 한반도 분단이었으며, 그 분단의 고착화는 주변 세력균형의 지지 세력에 의해 더욱 공고화 되어왔다. 다만, 현재는 중국의 부상으로 그 세력균형이 다시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하에 북한은 핵무력 완성에 이르게 되었으며, 남한은 경제적으로 부상하였지만, 북한의 핵과 남한의 경제력은 미국과 중국의 핵과 경제 세력을 흔들 만큼 우세하지는 않다. 중국에서 부상한 패권 세력은 여전히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을 상대해야 하므로 이들을 무시하고 한반도를 압박하여 패권을 확장하기 힘든 입장인 것이다.

중국은 2010년 이후 해양진출에 대한 욕구를 본격화하고 해양강국을 실현3) 하기 위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시킨다. 이는 군사적으로 열세인 베트남으로 하여금 미국과 일본의 해양안보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중국은 남중국해 해양 남하 실현에 어려움을 겪자 베트남의 이웃 국인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와 육상협력 거리를 더욱 좁혔으며, 해상에서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과의 경제협력 거리를 좁혔다. 특히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12 해리 암초 영해권 분쟁중인 국가들을 포섭하였고 이들 국가와 전략적인 항구협력과 항만경제협력을 진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항구 및 항만 협력은 배제되었다. 중국이 남중국해를 향한 국제관계 지형을 중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고자 동남아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동안, 베트남은 중국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자국 해상 안보를 지키기 위하여 미국과 일본에게 협력하는 동기를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동남아시아 해상과 육상의 일대일로는 베트남 지역만이 중국 일대일로 협력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중국은 베트남 주변국들을 중국에게 우호적으로 만듦으로써 베트남을 역으로 압박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 마련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를 한반도 주변국들과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베트남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이 한반도 이웃 국(강대국)을 이용하여 한국을 뜻대로 압박하기가 쉽지 않은 국제정치적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한반도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강대국을 이용하여 한국을 압박하는 방법보다 한국 포섭하여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효과적인 상황인 것이다. 중국이 한국에게 우호적인 구애를 해야만 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지정학 차이 3)
한-미 동맹관계는 베트남과 미국의 해양전략 협력관계와는 깊이가 다른 관계이며, 이는 한국과 베트남의 대중 정책 방향에도 차이를 지니게 한다. 

미국과 베트남 관계는 중국 공산세력 남하를 저지하고자 하였던 베트남 전쟁, 즉 미국이 베트남에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시기(1954-1975)로 기원한다. 1955년 남 베트남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월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지엠 정권에 대폭적인 군사지원을 단행하고 있었다. 지엠 정권이 제네바 협정에서 예정되어 있던 남북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자 베트남의 남북 분단은 고착화된다. 1964년 8월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존슨 정권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전쟁이 장기화 되자, 미국 내에서는 월남전쟁 반전운동이 고조되었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기에 이른다. 1973년 1월 미국과 북 베트남 사이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3월 미국은 길고 지루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한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으며, 곧이어 미국은 대 베트남 경제제재(Embargo)를 실시하게 되는데, 당시 하노이 정부는 국토를 통일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미국, 중국, 일본, ASEAN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전면철수를 감행하는 1989년까지, 하노이 정부는 약 11년 간 사실상, 미국•중국을 포함한 모든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상태에 이른다. 내부적으로는 공산 경제 실패, 외부적으로는 경제 제재이라는 2 중고를 극복하기 위해 결국 베트남 정부는 1986년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Doi Moi, 쇄신)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당시 정책의 핵심은 1987년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하고 국제적 고립에 따른 경제난관 타개를 위한 외국과의 경제협력 확대 및 시장경제요소 도입하는 급진적 방향 전환이었다. 이후, 베트남은 1991년 중국-베트남, 일본-베트남 국교정상화, 1992년 한국-베트남 국교정상화, 1995년 미국-베트남 국교정상화를 순차적으로 실현하고, 같은 해 ASEAN에도 정식 가입한다. 당시, 미국은 대 베트남 봉쇄(1975년)로부터 19년이나 지난 1994년 2월 경제제재조치 해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때 베트남에게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국가인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의 단계별 완화조치에 따라, 1992년부터 베트남에게 최초의 대규모 경제원조(3억7천만 달러)를 제공한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인도-태평양(Indo-Pacific) 전략’을 견인하고 자신이 아시아에서 발전시켜온 ‘자유와 번영의 호(弧)’ 아시아 경제통합전략을 적극적으로 실행시킴에 따라, 일본과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하던 베트남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밀접 시킨다. 미국의 트럼프정부 역시 아시아 태평양지역 패권유지를 위해 해군력 증강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러한 축에 베트남을 동승시킴으로써 남중국해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4)

6.25 전쟁 후,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군사동맹의 관계하에서 양국관계를 발전시켜왔다. 한-미 동맹은 냉전시기 한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고 자유민주체제의 경제가 공산경제체제보다 우월성이 있음을 증명해주는 지지대 역할을 했다. 오늘날 베트남이 비록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베트남과 미국관계는 미국의 대 베트남 경제제재 조치와 해제, 그리고 세계무역체제 시스템에 안정적으로 합류하는 단계의 연장선 상에서 양국관계가 조심스럽게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베트남과 미국은 아직 동맹의 가치를 논할  긴밀한 단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베트남이 느끼는 대중국 갈등 인식은 한국이 중국에게 느끼는 갈등 인식보다 훨씬 깊고 어려운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미 동맹관계는 베트남-미국의 해양 협력(인도태평양 전략-남중국해 항행의 자유)관계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로 중국을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 경계에 있는 양국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과의 협력 깊이는 한국과 베트남이 중국을 상대하는 인식과 그 정책방향에 차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지정학적 요인과 국제정치의 세력균형 문제는 ‘베트남-중국 VS. 한국-중국’ 관계가 지니는 관계 수준을 서로 상이하게 구분 짓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남중국해 분쟁의 갈등상황,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 이해관계, 미국과의 관계형성 깊이’에서 오는 지정학의 차이는 중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데 전략적 어려움을 제공하며, 한국에게는 베트남 보다 우호적이며 안정적인 완충지대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향후, 미-중 갈등과정에서 중국은 한국에게 우호적인 영향력 유지를 고수할 것이며, 동맹국인 미국은 동맹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 방향은 미-중 갈등의 완충역할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지정학적 전략 마련이며, 이를 위하여 양 강대국과의 관계 깊이를 이전보다 강화하여 그들의 충돌에서 오는 충격을 기민하게 대응·흡수하는 전략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또한 미-중 갈등이 심해지는 국면에서는, 양측의 이해관계 조정을 위한 미국과 중국의 긴밀한 소통 창구 필요 및 강화의 기회가 열릴 것이며, 완충지대로서의 한국의 적극적 역할도 기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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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와 청나라 조약에 의해 획정된 북부만 지배권 문제를 두고 양국의 지배권 공방은 지속되어 왔는데, 2000년 12월 25일 북경에서 북부만 국경 획정 협정이 타결(베트남 53.23%, 중국 46.77% 귀속 결정)되기 전까지 양국은 석유가스 탐사, 시추, 개발과정에서 지속적인 충돌과 갈등을 겪었다. 응웬 티 한 (2015) 43-46쪽 참조.

2) 1956년 디엔비엔푸 전쟁 패배로 프랑스가 정식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프랑스는 남베트남 영토에 귀속된 남중국해 섬들을 하노이 정부로 넘겨주었다. 이때 하노이 정부는 남중국해 섬들에 군대를 파견하고 본격적인 관리를 하게 된다. 당시 파라셀 섬들에 대한 지배권 상황은 서쪽 섬들은 베트남이 점령, 동쪽 섬들은 중국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후 1974년 1월 베트남 전쟁 패전의 기운으로 미국과 남베트남이 파라셀 군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상태가 되자, 중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파라셀 군도 전체를 재빠르게 점령하여 오늘날까지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스프래틀리 섬들과 관련하여서, 1975년 이후, 중국과 베트남은 섬의 점령 수를 늘리기 위한 경쟁을 지속하였는데, 1988년 3월 중국 전투함은 다시 한번 베트남군이 주둔 하던 스프래틀리 6개 섬을 무력으로 점령한다. 현재 스프래틀리 섬은 베트남 21개, 중국7개, 말레이시아8개, 필리핀7개, 대만1개, 브루나이는 해양관할권만 주장하고 있다. 

3) 중국은 남중국해에 구단선(nine dash line, 2009년 5월 UN대륙붕한계위원회 제출)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고, ‘핵심 이익(core interest, 2011년 「중국의 평화적 발전」백서에 기술)’ 선포를 통해, 중국이 해양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해양진출로 확보작업을 강화한다.

4) 2019년 11월, 베트남은 10년 만에 새로운 국방백서를 발표하였는데, 처음으로 ‘베트남이 미국에게 군사적 유대관계에 개방적일 수 있음’을 밝혔다. 백서에서는 ‘중국과의 군사관계 발전이 이전보다 강화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낀다면, 베트남 전쟁시 적국이었던 미국과 군사적 협력관계를 허용할 수 있음’을  명문화 하였다. 나아가 베트남이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항행의 자유정책’을 공식 지지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의 군함은 양국 간 연례해군훈련 참여 일환으로 베트남 항구를 방문할 수 있다’고 공식 언급하고 있다. (Oxford Analytica, Feb 12, 2020)


<참고 자료>
유동원. 2015. “중국의 남중국해 전략 변화 : 새로운 확대전략의 실천과 특징”, 『중소연구』, 제39권 제3호, 2015 가을

응웬 티 한. 2015. “베트남-중국 간 영토◦영해 경계 획정의 역사”, 『영토해양연구』, 제10호, 동북아역사재단. , 2015 겨울.

파스칼 보니파스. 2019 『지정학, 지금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서울:가디언

Dang Cam Tu and Hang Thi Thuy Nguyen, 2019, “ Understanding the U.S.–Vietnam Security Relationship, 2011–2017”, The Korean Journal of Def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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