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주요 이슈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견해 및 제언이 담긴 칼럼을 제공합니다.

미중관계와 홍콩, 대만문제

김진호 소속/직책 :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1-05-31

미중관계와 홍콩, 대만문제1) 

1. 한국과 중국 그리고 타이완(대만)과2) 홍콩

대한민국이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단교하면서 우리는 현재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대만)이라는 명칭으로 부상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과 분단된 섬나라 대만을 분리 인식하고 있는데, 때론 양안관계(중국과 대만의 관계) 및 미중관계의 갈등 문제로 중국과 타이완 문제를 보게 된다. 

현재 타이완(대만)으로 호칭되는 중화민국(자유중국)은 대한민국과 1949년 1월 4일에 수교한 이후 서울에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을 개설하여 한국정부와 꾸준한 협력을 해왔으나, 1992년 8월 24일 단교후에는 한국의 대중국 정책의 중요성에 따라 중화민국의 역사와 그 존재는 과거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그러나 사실 중화민국(대만)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대한민국이 독립하면서 처음으로 수교한 국가이자 한국의 국적항공기가 처음 기항한 지역이며, 냉전시기 미국을 중심으로 안보협력을 강화했던 국가였다.

한국의 북방외교의 결과인 1992년 한중수교로 우리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타이완은 중국과 분단된 중화문화가 존재하며 ‘섬’으로써의 지역적 특징이 있는 곳으로 인식된다. 즉, 현재 한국인들은 언론매체나 여행을 통해 대만을 인식하기도 하고 국제정치적 양안관계의 틀에서 중국과 타이완(대만) 문제를 보기도 한다.

양안관계는 1971년 중화민국을 밀어내며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중국정부는 꾸준히 외교력을 확대하면서 지구촌 국가와 수교에서 일괄되게 ‘하나의 중국 원칙(One China Policy)’을 견지해 왔는데, 이는 중국이 대만을 봉쇄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외교적 봉쇄전략이었다. 이와 같이 1992년 한국과 수교에서도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사회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수교국에게 관철해 왔다. 이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의 완전한 통일에 대한 목표를 관철하는 정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는 수교와 동시에 이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과는 단교를 강요받는다.3) 이에 따라 당시 중국과 수교하는 한국에 있어서도 중국은 한국에서 합법적 지위를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92년 8월 24일을 기해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이 대사관 부지는 중국에게 이관된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화교학교나 인근 건물 그리고 연희동에 있는 화교고등학교는 타이완 정부의 자산이 아닌 화교 등 민간 자본으로 분류되기에 아직도 한국내에서 중화민국의 잔영을 모습을 볼 수 있다.4) 

즉,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모습이 공존하며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슷하게, 한국은 한미동맹의 기초에서 한반도문제를 봄과 동시에 미중관계나 양안관계의 복잡함 속에서도 정치와 경제적으로 한미관계나 한중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며 타이완과의 관계도 유지하는 것이다.

중국의 언론의 보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조하는 중국 대내외 정치에서 대만문제는 최고로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중국과 국제사회, 특히 미중관계에 있어서도 타이완문제는 중국의 핵심이익으로 분류되는 최고의 국가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안(중국과 타이완)의 민감한 문제를 미국은 역사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종전후 국공내전의 경험을 통해 중국과 타이완의 민감성을 역사, 사회, 정보, 정치, 경제, 안보적 측면에서 잘 이해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한국에 있어 과거 중국과 교류하는 교두보였다. 즉, 중국이 국내 도시를 국제적으로 개방하지 않던 시기 홍콩은 한국이 중국과 교류하는 창구가 되었고 한국산업의 동남아와 중동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3년 한국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사건의 처리와 한중 교섭도 홍콩이라는 관문을 통해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이후에도 한국은 중국과 직접교류를 증대시킴과 동시에 홍콩이라는 특수 지역을 통해 한국, 중국, 홍콩이라는 접지면을 충분히 경제와 안보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최근 국제적 이슈가 되었던 홍콩 민주화시위에 관련하여 한국은 중국이라는 양자관계에 직면해 한국의 국익이 우선시되는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한국이 양안관계나 서구의 대중국 관계와는 특별한 환경에 있다는 것과 한중경제의 상호의존성과 한반도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타이완(대만)과 미중관계

대만해협은 지리적으로 동북아 동남아의 해양을 연결하는 주요 해상운송과 군사안보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타이완의 해양은 일본의 오키나와(沖繩)에서 대만 동북의 열도와 해양으로 이어지는데, 고구마처럼 길게 생긴 남단은 다시 필리핀 북단의 섬과 연결되기에 대만은 중국의 동중국해(중국의 동해)에서 남중국해를 연결하고 서태평양과 연결되는 동북아의 해양 요충지이다.5) 

또한, 양안을 갈라놓는 대만해협은 천해의 해양으로 타이완이 중국으로부터 쉽게 침략을 받을 수 없는 천연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대만 본토 위아래로 길게 이어진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가 많은 중앙산맥(中央山脈)의 동쪽 군항과 항공기지는 대만이 중국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천연의 요세를 제공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면 중국이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 화남권(華南圈)을 포함한 화중(華中), 동북권까지 군사안보적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타이완은 미국이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6)

여러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면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혹은 미국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데 가장 큰 축이 되는 지역이 대만과 관련 해역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혹자는 타이완을 침몰하지 않은 항공모함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리적 문제외에도 타이완은 과학기술과 정부체제와 교육을 포함한 사회가치관 등에서도 미국 그리고 일본 등 서구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와 역사적 관계를 기초로 사회주의 중국과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

그러나 타이완은 경제적 측면에서 문화적 유사성과 지리적 환경 그리고 경제발전의 연행구조의 특성에 따라 중국과 밀접한 관계도 유지해야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환경은 중국이 1970년대후반에서 1980년대에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자본과 기술을 화교권에 의지했다는 의미에서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화교권의 경제력이 중국본토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도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으로 복잡한 양안관계는 양안간 인적 그리고 물적 교류를 더욱 빈번하게 하고는 있지만, 정치적 이슈와 안보 및 경제에 관련해서 양안은 서로 경쟁하듯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대만지역의 강점인 제조업과 농업 그리고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 IT산업은 중국 여러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식품물류기업인 통일그룹(統一集團), 아이폰을 포함한 전자제품 조립의 강자인 폭스콘(鴻海精密工業), 반도체 기업인 TSMC(臺灣半導體) 그리고 화공과 전자의 난야그룹(南亞集團) 등 대만기업의 중국투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만, 중국 그리고 미국의 관계를 봐도 쉽게 이해될 것이다. 여기에는 양안관계의 특수성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 특히 일본의 대만과 중국에 대한 경제 및 안보적 이익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8)

3. 홍콩과 미중관계

홍콩은 영국 식민지시절 형성된 사회 가치관에 기초하여 서구적 가치관을 기초로 통치되던 사회였다가 중국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혼돈과 마찰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즉, 홍콩은 약 150여년간 영국의 식민지문화에 기초하여 중국내지와 교류하며 변화한 국제도시로 중국, 대만과는 서로 정치행정과 사회 가치관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동양의 파리’라는 말과 같은 특징이 있었던 지역이라 볼 수 있다. 비록 중국, 홍콩, 대만이 모두 중국인이 사회 기초가 되는 지역이지만, 그 정치체제와 행정제도 및 문화와 관습에는 각기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홍콩은 영국이 말레이반도에 정착하며 동시에 중국과 연계된 지역을 얻기 위해 쟁취한 식민지이기에 동남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개척의 후발주자인 영국은 대만, 일본과의 교류와 거점 확보보다는 그들의 지나갔으나 거점이 되지 않았던 말라카(Malacca) 해역과 광둥성 홍콩에 거점을 만들고 중국과 교류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고,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홍콩에 있는 오래된 영국계 회사들도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 건설시기의 상업과 관련이 있다 볼 수 있다.

홍콩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이전까지는 중국이 해외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개혁개방이 추진된 1970년대후반부터은 홍콩은 세계와 중국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중국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정보를 수취할 수 있는 중국과 연결된 통로였다. 세계는 홍콩을 통해 중국과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즉, 영연방의 식민지로 홍콩은 서구세계를 중국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고, 외부인이 중국과 교류하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홍콩은 이러한 지경·지정학적 특징에 따라 세계의 금융과 무역 그리고 풍부한 정보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은 1980년대초부터 영국과 홍콩반환에 대한 회담을 진행하며 대만에 시행하기 위한 ‘일국양제(One Country Two Systems)’를 홍콩에 적용하며 50년 불변의 약속으로 홍콩을 1997년 반환받았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의 홍콩에 대한 직간접 영향력은 정치, 경제, 행정, 사회,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강화되었고, 홍콩인들의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정부 및 사회환경에 대한 불만은 가중되었다. 이것이 ‘우산혁명’으로 폭발되며 홍콩의 민주화시위는 더욱 가중되었는데, 중국은 이것은 홍콩사회의 경제적 문제로 보는 측면이 강했다면, 홍콩인들의 사고는 과거 홍콩인이 우선적인 사회가 그들에게 불편한 사회로 바뀌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이는 ‘일국양제’의 홍콩 자치가 결국 중국정부의 영향으로 홍콩주민들에게 불리한 사회환경에 대한 불만이 폭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국양제’에 대한 양측의 이해와 현실의 차이가 결국 홍콩의 민주화시위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안문제나 국제적 시각에서 본다면, 홍콩의 문제는 타이완의 홍콩에 대한 영향력 약화 그리고 국제사회가 갖고있던 홍콩이라는 지역의 장점이 중국의 영향력으로 약화되면서 중국과 외부세계는 홍콩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표현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홍콩인들은 친중국적이거나 반중국적 사고가 홍콩과 중국 그리고 국제사회 구조에서 복잡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제사회나 타이완의 기대와는 다르게 홍콩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진 것은 바로 홍콩시위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중국정치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미중관계 측면으로 보면, 홍콩에 영사관 등 많은 기구를 유지하던 미국과 영국 등 서방세계는 결국 중국과의 힘겨루기를 홍콩민주화라는 현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중마찰에서 홍콩문제는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와 인권에 기초한 가치관과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중복되어 있다 볼 수 있다. 즉, 홍콩문제는 미국과 타이완의 상호의존과 협력을 더욱 강화게 만들었고, 중국은 홍콩시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대만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다.9)

4. 결론—미중관계와 홍콩, 타이완

중국, 홍콩, 타이완 세 지역은 서로 교류가 빈번하기에 각지역의 특성을 갖고 서로 다른 체제의 주민과 교류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여기에는 정치, 경제적 그리고 사회 가치관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교류와 대립을 반복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경제적 양안삼지(중국, 대만, 홍콩)관계는 정치적 양안관계나 홍콩문제 및 국제관계의 영향으로 정치적 하부구조가 되기도 한다.

양안문제를 보면 중국이 해군과 공군력을 강화하는 이유도 바로 대만 통일을 통해 해양국가로 발전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에 대만 최서단 중국본토 코앞의 진먼다오(金門島) 전투를10)보아도 중국의 군사력 강화와 대양으로의 진출의 꿈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도 시진핑이 주창한 ‘중국몽(中國夢)’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다.

양안관계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대만에 대한 정책이 연결되어 왔다면, 타이완(중화민국)은 과거 장제스, 장징궈(蔣經國) 국민당 정부시대에 이어 본토 출신 리덩휘(李登輝)가 지도자가 되면서 대만 본토화는 가속화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또한, 타이난(臺南) 출신 민진당 천수이벤(陳水扁) 총통시기에 타이완은 점차 대만인을 강조하는 타이완의 이미지와 민주화와 독립을 향한 과정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경제정책에서 실패로 국민당 마잉주(홍콩 출생 외성인 馬英九) 정부가 등장하면서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서로 협력하는 단계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민진당 본성 출신 차이잉원이 집권하면서 타이완은 본토 정서에 기반한 정치로 사회분위기가 바뀌면서 중국대륙과 선을 긋는 역사교육으로 타이완 위주의 역사 교육과 사회분위기 쇄신으로 본토화의 길을 걸으며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국민당과 유대를 강조하던 미국 정부는 이제 반중국적 정서를 갖고 있는 민진당 정부를 친중국대륙적 회유성 정서를 갖고 있는 국민당에 비해 더욱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12) 미국의 신현실주의 실리주의는 미국과 세계라는 구도에서 미국의 국가이익(國家利益)에 우선한 대외정책이 시기별로 나타나는데, 이는 냉전시기의 국가이익이나 현재 신자유주의나 신현실주의 국제상황과 접목되는 부분이다.

현재 미국은 일본과 협력하며 대중 봉쇄를 목적으로 안보 및 경제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타이완은 중국과 안보적으로 대립하며 미국 및 일본과 안보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정학 및 지경학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반중국적 정서가 강하며 미국과 우호관계를 중시하는 타이완은 미국이 중국 견제 및 중국 봉쇄에 아주 중요한 보검(寶劍)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타이완의 입장에서도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타이완의 안보와 경제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홍콩의 반환과 중국의 영향력 강화 그리고 미중의 전방위적 갈등은 미국과 타이완 그리고 일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도체 강국인 미국과 타이완, 일본의 협력은 결국 중국 과학기술 발전을 봉쇄하거나 저지하기 위해 그 관계가 더욱 공고해 질 것으로 보이며,13) 이에 한국의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과학기술의 미국과 협력은 더욱 중요시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반도체는 타이완과 경쟁해야 하고 배터리는 중국과 경쟁하면서 중국국내에서도 사업을 유지해야하는 하기에, 한국정부는 미국과 협력함과 동시에 대중관계를 고려하면서 한반도 안정도 신경써야 하는 절충적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미중관계의 대립은 결국 양안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며, 이는 중국의 홍콩에 대한 절대적 통치능력을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양안의 경제적 협력은 양안관계가 호전되기 전까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안관계의 변화는 양안 지도자 사이의 성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중관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 틀에서 미중관계가 악화된다는 것은 결국 홍콩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만들 것이며, 양안관계의 악화로 안보와 경제적 관계에서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 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미국의 중국 봉쇄는 결국 안보를 포함한 중국의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반도체 동맹을 통해 중국 과학 및 군사기술 발전의 저지에 목적을 둘 것으로 보이기에 당분간 중국 정부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와 외국과의 협력모색은 꾸준하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은 타이완, 일본, 유럽 및 한국과 동맹을 형성하여 반도체, 배터리 등 관련 산업의 미국 위주의 네트워크(방패)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14) 


-----
1) 연구자는 1985~1990년, 2010년 홍콩, 1983년 시작해서 1998~2003년과 현재까지 정기적으로 대만에 거주하고, 1995~1998년 그리고 2019년 북경과 선전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타이완 단교도 직접 체험하고 1997년 홍콩반환도 직접 목도하며 양안관계를 체험적으로 연구해 왔다.

2) 편리한 이해를 위해 지역적 의미에서는 대만지역을 ‘대만’ 정부적 의미에서는 ‘타이완’으로 표기했다.

3) 한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후에도 비공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측은 1993년 7월 27일에 일본 오사카에서 대표부 상호 설치에 합의했고, 1993년 11월 25일에는 타이베이시에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가 개설되었고 1994년 1월 25일에는 서울시에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2004년 9월 1일에는 단항되었던 대한민국과 대만 간의 항공 운항이 재개되었다.

4) 국민일보, “우린 대만·중국 편가르지 않아요”… 신해혁명 100주년, 서울 한성화교소학교의 오늘, 2011년 10월 13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450506&code=11131300

5) 타이완 정부는 일본 센가쿠열도(대만명 釣魚島)열도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하고 있으며, 남중국해에는 타이핑다오(太平島)라는 군사기지화된 도서도 영유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샤먼(廈門 Amoi) 앞 약 4km에는 진먼다오(金門島)라는 군사기지화된 섬을 영유하고 있는데, 양안교류에서 샤먼과 진먼다오는 과거 양안삼지의 홍콩과 같은 양안 교류의 접점이 되고 있다. 즉, 샤먼과 진먼다오 주민은 여행사증 없이 기간내에 양쪽을 오갈 수 있는데, 양안관계가 경색되는 경우 교류는 중단된다. 즉, 양안의 경계가 대만해협이지만 타이완은 중국영토 코앞에 진먼다오를 영유하고 있기에 대만의 군사안보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6) VOA, 미 군함, 타이완해협 2주 만에 또 통과, 2020년 4월 24일, https://www.voakorea.com/world/us/us-warship-sail-taiwan-strait

7) 신동아, 대만은 지금도 中 해양진출 막는 美 불침항모(문흥호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장), 2018년 10월 3일,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479388/1

8) 내일신문, 마잉주의 타이완 ② 양안경제통합, 2008년 4월 8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6&aid=0001942824

9) 연합뉴스, "홍콩, 미국의 특별대우 받을 자격 안돼"…바이든 정부도 재확인, 2021년 4월 1일, https://www.yna.co.kr/view/AKR20210401004400071?input=1195m

10) 중국 인민해방군은 양안이 분단되던 1949년 10월25일 밤 약 1만명이 진먼다오 구닝터우(古寧頭) 연안에 기습 상륙해 3일간 대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약 3천명이 사망하고 7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9년 후에도 다시 집중 포격전으로 진먼다오를 공격했으나 침공에는 실패했다.

11) SBS 뉴스, 중국, '미국과 밀착' 타이완에 "독이 든 술 마시는 행위", 2021년 4월 14일,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79389&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12)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미국의 국익이 우선시하는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국민당, 공산당과 모두 같이 협력을 하였고, 일본을 군사통치하면서는 국민당과의 협력을 그리고 중국의 변화를 원하던 협력시기에는 중국정부와 협조적이었다가 중국과 대립이 격화되면서는 타이완에서 국민당 보다는 민진당과의 협력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로 대만(중화민국)과 단교하면서 미국 국내법인 ‘대만 관계법’을 통해 타이완과는 꾸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는 대만으로 이전한 국민당과의 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로 유지하다가 국가의 지역정부의 관계로 변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중이 대립하는 현재의 시기, 타이완의 가치는 이전 홍콩의 전략적 위치를 뛰어넘는 강한 중국견제의 목줄이 될 수 있다. 중국은 미중대립을 수세적으로 지키며 동시에 양안문제에도 신경을 더욱 써야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13) KBS NEWS, 캡틴 아메리카, 타이완 반도체로 중국 때린다, 2020년 12월 12일,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069836&ref=A

14) TS Lombard, Geopolitical Spotlight shifts to semiconductors - the new oil, https://blogs.tslombard.com/geopolitical-spotlight-shifts-to-semiconductors-the-new-oil



⟪참고자료⟫
김진호, 중국의 일국양제와 홍콩의 민주화: 중화 애국심과 홍콩 본토화, 현대중국연구, 현대중국학회, 2020.

김원곤, 홍콩문제가 양안관계에 미치는 영향, 디지털융복합연구, 한국디지털정책학회, 2020.

문흥호, 중·미관계와 대만문제: 미국의 대 대만정책을 중심으로, 중소연구, 아태지역연구센터, 2008.

문흥호, 차이잉원의 재집권과 양안관계, 중소연구, 아태지역연구센터, 2020.

신상진, 시진핑 신시대 중국의 대만정책과 양안관계의 변화:‘평화발전’에서 ‘평화통일’로의 이행, 중소연구, 아태지역연구센터, 2019.

신종호, 트럼프 시대 미중관계 전망과 한반도에 대한 함의, 온라인시리즈; 2017-02, 통일연구원.

이규태, 한국과 대만의 관계 -‘中華民國 100年’: 韓台關係의 역사와 현실-, 중국학논총, 한국중국문화학회, 2011.

이은미, 김진호, 코로나19 팬더믹 환경에서 미·중 갈등과 한반도 국제관계, 평화와 종교, 한국평화종교학회, 2020.

장윤미, ‘하나의 중국’ 원칙과 양안(兩岸)의 갈라진 마음, 현대중국연구, 현대중국학회, 2020.

주형민, 미중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협력자 혹은 경쟁자, 평화연구,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2011.

정호경, 바이든 시기 미·중 관계 변화 가능성 분석 -경쟁과 협력의 관점에서-, 대한정치학회보, 대한정치학회, 2021.

풍엽, 중국 다자외교와 미중관계 : 아시아태평양 역내 갈등관계의 고찰, 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