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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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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역사결의와 중국 공산당 권력구조 변화 가능성

이홍규 소속/직책 :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중국연구센터 소장 2022-01-13

두 번째 백 년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 제3차 역사결의

2022년 새해 신년사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2021년 한 해가 중국 공산당과 국가의 역사에서 이정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즉, 2021년은 ‘두 개 백 년’ 분투 목표가 역사적으로 교차하는 해로, ‘소강사회의 전면적 완성’이라는 첫 번째 백 년 목표를 실현한 중국 공산당이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이라는 두 번째 백 년 목표를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1)
 
이러한 차원에서 2021년 11월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19기 6중전회는 두 번째 백 년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 회의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이 회의에서 통과된 이른바 중국 공산당의 세 번째 역사결의는 중국 공산당의 첫 번째 백 년 역사를 총결하고 두 번째 백 년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 역사적 선언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의 백 년 분투의 중대 성과와 역사적 경험에 관한 중국 공산당 중앙의 결의”(이하 ‘3차 역사결의’)라는 이름의 이번 역사결의문 서언(序言)에서는 이번 ‘3차 역사결의’가 제출된 이유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로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전면 건설을 시작하는 새로운 여정, 새로운 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꼽고 있다.2)
   

제3차 역사결의의 시진핑 시대 찬양

이번 ‘3차 역사결의’는 중국 공산당 100년사를 4단계로 인식하여 이를 평가한다. 첫 번째는  1921년 창당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신민주주의 혁명 시기로, 그 중심 임무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민족 독립, 인민 해방을 쟁취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기본적인 사회 조건을 창조한 것에 있었다고 규정한다. 두 번째 단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서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로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 완성과 사회주의 건설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바로 1978년 개혁개방 선언부터 2012년 시진핑 집권 직전까지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시기, 즉 중국이 빈곤 탈피와 부국을 통해 물질적 조건을 구축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를 중국 특색사회주의 신시대 창설 시기로 규정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제3차 역사결의에서 이 시기의 다양한 성과에 대한 묘사가 전체 내용에서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 특색사회주의 신시대의 평가 역시 당의 영도, 종엄치당, 경제 건설, 개혁개방 심화, 정치 건설, 의법치국, 문화 건설, 사회 건설, 생태문명 건설, 국방과 군대 건설, 안보 수호, 일국양제와 통일 추진, 외교 등 무려 13개 분야에서의 성과를 거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몇 가지 내용만 추려서 말한다면, 우선 당의 영도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로 당 중앙의 ‘집중통일영도’가 당의 영도의 최고 원칙이며 ‘집중통일영도’ 원칙이 새로운 정세 하의 당내 정치 생활의 준칙으로 정립됐음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시진핑 집권 이후 당의 영도 원칙에서 ‘집중통일영도’, 즉 최고 지도자로의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결정 시스템을 당내 준칙으로 제도화했음을 명시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 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으로의 권력집중을 역사적 문서로 봉인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밝힌 이번 ‘3차 역사결의’가 제출된 배경 설명에도 명확히 나와 있다. 즉, 3차 역사결의가 제시된 배경 중 하나로 시진핑의 당 중앙 핵심 지위와 전 당의 핵심 지위를 수호하고 당 중앙의 권위와 집중적 통일 영도 체계를 수호하여 중국 공산당 전체가 통일되어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꼽고 있다. 
  
이외에도 제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집권 이후 다양한 성과들을 열거하고 있다. 종엄치당(엄격한 당 관리)을 통한 부패 척결, GDP 100억 위안과 1인당 GDP 1만 달러를 초과하는 경제발전 성과, ‘일대일로’ 추진 등 보다 심층적인 대외개방, 전면적인 의법치국, 빈곤퇴치와 코로나19 방역 성공, 국방과 군 현대화, 홍콩 등에 대한 국가안보 수호, 중국 특색의 대국 외교 등이 그것이다. 


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노선의 승리를 의미

3차 역사결의는 덩샤오핑,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의 업적을 차례로 나열했지만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시진핑 집권 직전까지의 30여 년의 기간과 전임 지도자에 대한 서술은 간단한 반면, 2012년 18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 집권 9년은 전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시진핑 노선이 덩샤오핑 노선을 공식 부정한 것도 아니지만 이를 추종하지도 않은 것으로 사실상 덩샤오핑 노선을 추종한 당내 개혁파와의 노선 투쟁에서 승리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과거의 제1차, 제2차 역사결의의 공통점 역시 당내 노선투쟁의 종결을 의미했고 각각 마오쩌둥 노선과 덩샤오핑 노선이 확립되는 계기였다. 즉, 1945년에 있었던 제1차 역사결의는 옌안(延安) 정풍(整風)운동을 통해 당내에 소련공산당 노선을 추종한 좌경노선인 ‘왕밍(王明)’ 노선을 교조주의 및 종파주의로 규정짓고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당의 노선으로 공식화했던 역사적 선언이었다. 또한 1978년 말 개혁개방 선언 직후인 1981년의 제2차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해 마오쩌둥의 오류로 강하게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추종하던 ‘화궈펑(華國峰)’ 노선을 범시파(凡是派) 좌경노선으로 규정짓고 덩샤오핑(鄧小平) 노선을 당의 노선으로 확립한 것이었다.3)
  
물론, 표면적으로 이번 3차 역사결의는 1, 2차 역사결의와는 달리 공산당 전임 지도자의 노선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덩샤오핑,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의 업적을 차례로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상황을 살펴보면,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시진핑 집권 직전까지의 30여 년의 기간과 전임 지도자에 대한 서술은 매우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2012년 18차 당대회 이후 9년밖에 되지 않은 시진핑 집권기는 전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적인 설명은 시진핑 노선이 덩샤오핑 노선을 공식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추종하지도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덩샤오핑 노선은 방권양리(放權讓利)의 슬로건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정부와 기업에 자율권을 부여하는 권력 분산(分權)에 입각하여 민간기업과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대하되 딴웨이(單位) 복지 체제를 해체하는 등 민간 주도의 경제사회정책을 펼쳤다. 또한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슬로건 하에서 WTO 가입 등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등 미국의 패권체제를 인정하는 현상 유지의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에 반해 시진핑 노선은 경제적으로는 국유기업을 중시하고 민간기업과 시민사회에 대한 정부의 경제조정 및 통제 능력을 강화해왔다. 또한 국가가 나서서 빈곤 탈피를 위한 재정투자 및 복지정책을 구축하는 것이다. 시진핑 노선은 2010년 이후 G2로 부상한 중국의 강대국 위상을 유지 강화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즉, 시진핑 노선은 대내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경제사회정책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현상타파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노선이다. 시진핑 노선은 사실 덩샤오핑 노선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3차 역사결의’는 전임 지도자를 비판한 1, 2차 역사결의와는 다르게 전임지도자를 계승하는 듯한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덩샤오핑 노선을 추종한 당내 개혁파와의 노선 투쟁에서 시진핑 노선이 승리했음을 공식화한 문서로 추후에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관영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제3차 역사결의’의 기초(起草)는 시진핑 당 총서기를 조장, 왕후닝 당 중앙서기처 서기와 자오러지 당 기율검사위 서기를 부조장으로 하는 문건 기초팀이 담당했지만, 문건의 내용은 중국 공산당 당내 인사는 물론이고 당외 세력인 민주당파, 전국 공상련, 무당파 인사 등의 광범위한 피드백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강조는 시진핑 노선의 확립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시진핑 권력의 공고화와 당 주석제 부활 등 1인 권력 체제의 제도화 

이번 역사결의문이 또 다른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향후 중국 공산당의 노선과 시진핑 체제의 지속가능성 여부의 관건이 될 2022년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발표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시진핑은 당 중앙의 핵심이자 전당의 핵심 지위에 있음이 역사결의로 확인되었으며 당의 영도 방식도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을 의미하는 ‘집중통일 영도(集中统一领导)’라고 역사결의에도 명기되었다. 이는 당의 역사결의를 통해 시진핑 1인 권력 지위를 보장하여 시진핑의 장기 집권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 공산당 100년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제시하는 내용에서도 3차 역사결의는 중국 공산당의 전면적 영도 특히, 당 중앙의 집중통일 영도와 민주 집중제를 견지하여 당의 핵심과 중앙 권위를 수호하는 것을 첫 번째 교훈으로 꼽고 있다. 시진핑의 권력집중 체제를 절대적으로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이번 ‘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1인 체제가 중국 공산당사에서 역사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며 따라서 시진핑의 장기 집권의 정당성이 중국 공산당의 역사 결의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결의로 역사적 지위를 획득한 시진핑의 1인 권력체제는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장기 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당 주석 제도가 부활될 가능성이다. 중국 공산당 당 주석 제도는 본래 1945년 7차 당대회 때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것으로 이는 1945년 4월 6기 7중전회에서 통과된 제1차 역사결의에서 마오쩌둥 노선의 승리가 공식화되고 마오쩌둥 1인 권력의 지위가 역사적으로 보장된 직후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당 주석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82년 9월 12차 당대회 때로 중국 공산당은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의 2차 역사결의를 통해서 마오쩌둥 1인 권력 체제를 공식 비판한 직후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번 3차 역사결의를 통해 시진핑 1인 권력 체제가 확립되었다면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 당 주석 제도가 부활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당 주석제가 부활되는 대신, ‘당 총서기 책임제’가 당 헌장에 명기되는 것이다. 여전히 덩샤오핑 노선을 추종하는 당내 개혁파가 여전히 당내에 남아있어 이들이 당 주석제 부활에 강하게 반발하고 대내외에서 당 주석제 부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우세할 경우 이러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2017년 19차 당대회 때 원래 당 헌장에 없었던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중앙정치국 회의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의 소집에 책임을 지며 아울러 중앙서기처 업무를 주최한다”라는 문구를 새로 삽입한 바 있었다. 만약 당 주석제가 부활된다면 이러한 문구도 필요 없게 되겠지만, 당 주석제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이러한 문구에 입각하여 ‘당 총서기 책임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당 헌장에 삽입하여 시진핑 1인 권력체제의 제도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4)


시진핑 사상의 역사적 권위 부여와 시진핑의 장기 집권 가능성

또한 이번 ‘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의 지도적 지위 확립을 명기했으며 신시대 중국 공산당이 두 번째 100년 목표 달성을 위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의 전면적 관철을 강조한 바 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은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헌에 지도이념으로 삽입되었고 2018년 3월 수정된 헌법에도 명기된 바 있었지만, 이제 ‘3차 역사결의’를 통해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은 2012년 이후 10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을 이끌 유일한 지도사상으로서의 역사적 권위까지 얻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공산당 6기 7중전회에 통과된 1차 역사결의에서 ‘마오쩌둥 동지를 대표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으로 호명됐다가 곧이어 열린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으로 당헌에 삽입되었던 전례를 감안한다면, 내년 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은 이제 정식으로 ‘시진핑 사상’으로 공식 호명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시진핑과 시진핑 사상의 역사적 지위가 3차 역사결의로 보장된 만큼 시진핑은 2022년 20차 당대회를 통해 집권을 연장하는 것은 이제 확고해졌다. 
  
물론, ‘3차 역사결의’에도 불구하고 돌발적 정세변화에 따라 내부 반발은 재현될 수 있다. 사회 통제를 강화해온 시진핑 노선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온 상황에서 부동산 위기 등 정부의 경제 관리가 실패하면 당내 개혁파가 여론에 기대서 반발할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나 정치국 구성원의 2/3 이상이 친(親)시진핑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당내 개혁파의 반발이 시진핑의 장기 집권에 큰 변수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더욱이 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으로 ‘후계자들을 육성하고 당원, 간부들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의 확고한 신앙자, 충실한 실천자가 되도록 교육, 인도할 것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강조가 현실화된다면, 이제 시진핑의 집권은 2022년 20차 당대회 이후 5년은 물론이고 2027년 21차 당 대회 이후에도 계속 연장되는 권력 기반이 구축될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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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国家主席习近平发表二〇二二年新年贺词”, 『新华网』 2021年12月31日. http://www.news.cn/politics/leaders/2021-12/31/c_1128222579.htm
2) “中共中央关于党的百年奋斗重大成就和历史经验的决议(2021年11月11日中国共产党第十九届中央委员会第六次全体会议通过)”, 『人民网』 2021年11月17日.   http://cpc.people.com.cn/n1/2021/1117/c64387-32284363.html
3) 제1차 역사결의의 제목은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제2차 역사결의의 제목은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제1차 역사결의와 제2차 역사결의 내용은 각각 다음의 원문을 참조하라. “关于若干历史问题的决议(一九四五年四月二十日中国共产党第六届中央委员会扩大的第七次全体会议通过)” http://jyt.gxzf.gov.cn/ztzl/jgdjzt/xxjl/P020210430383529513369.pdf ; “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一九八一年六月二十七日中国共产党第十一届中央委员会第六次全体会议一致通过)” http://www.people.com.cn/item/20years/newfiles/b1040.html
4) “夜话中南海:中共二十大党章将推出“党主席负责制”?“. 『RFA 』2020年8月31日. https://www.rfa.org/mandarin/zhuanlan/yehuazhongnanhai/gx-083120201454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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