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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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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이슈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견해 및 제언이 담긴 칼럼을 제공합니다.

한국화교의 재구성과 정체성 변화

김윤태 소속/직책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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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인용, 보도하시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CSF(중국전문가포럼)”로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 주민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 무척 기쁘다”, “어제 집으로 배달된 후보들의 선거 공보를 밤늦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화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던 2006년 5·31지방선거 당시 화교들의 감회다. 평생을 한국에 살면서 교육·납세·근로의 의무를 모두 이행하지만, 정작 권리는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정권의 부여는 화교들의 한국 정체성 형성에 더없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한국화교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출신국이나 국적국에도 제대로 귀속되지 못한 외톨이 신세였다. 어느 한 국가에서도 이들을 구성원으로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한국화교는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었다. 산동성 출신이지만 공산정권과의 대치 상황에서 자유진영인 중화민국(대만)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 사람이 됐지만, 대만 사람들은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한다. 중국 산둥은 그들의 고향이니 당연히 귀속감이 있겠지만 중국사람들 역시 이들을 한국인이라 한다. 그런데 정작 정착지인 한국도 이들을 한국인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중국인도, 대만인도, 한국인도 아닌 복잡한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집단이 되었다. 또한 한국화교는 계속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더욱 복잡한 구성으로 재구성되며 정체성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적국인 대만 사회의 변화, 1992년 한중 수교와 중국과의 교류 확대, 신화교의 진입, 한국의 화교정책의 변화 등에 따른 ‘한국 화교’ 사회의 변화는 실로 드라마틱하다.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한국화교의 초국가적 사회 공간의 구축과 다중 정체성 형성에 적극적인 추동력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국화교의 조선 정착


한중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각 역사 시기마다 개별 또는 집단으로 이입과 이출이 빈번했다. 지금 우리에게 ‘한국 화교’로 불리는 집단의 한국 정착은 19세기 말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에 입국한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1885년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무역에 관한 규약(朝淸商民水路贸易章程)에 따라 화인(華人)들이 대거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당시 청(淸)은 조선에서 비교적 강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화인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비교적 높았다. 화교인구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그 경제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화교 사회의 정치 경제적 지위는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일제강점기를 맞으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화교 경제력에 의해 조선의 물가가 좌우되고 조선인의 화교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아지자,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화교에 대해 여러 가지 제도적 제약을 실시했다. 1920년부터 관세를 4-5배 인상하기도 했고, 화교 상인의 경제 명맥이었던 모시와 비단의 수입 과세율을 대폭 인상하거나 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하는 등 화교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1) 이러한 제도적 제한 외에도 1931년 발생한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화교 배척 사건은 중국인의 조선에서의 입지와 영향력을 급격히 하락시켰다.2) 전국적으로 번진 화교 배척 사건으로 인해 100명이 넘는 재조선 화교가 사망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물적 피해도 잇따랐다. 결국 재조선 화교 총수의 10%에 해당하는 1만 명 이상의 화교들이 중국으로 귀국했고, 연이어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인해 재조선 화교 총수의 1/3에 해당하는 약 3만명의 화교가 중국으로 귀국했다.3) 영세 규모의 포목 소매상의 폐점과 포목수입상 파탄으로 포목 유통망이 무너지면서 화교 경제가 연쇄적으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4)



한국사회의 배화정책과 한국화교


한국 화교에게 해방은 한민족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규제에서 해방된 의미를 갖는다. 미 군정청의 사업 자유 허용으로 화교는 남한에서 자유롭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미 군정청이 일본과의 무역을 단절하자 남한은 중국과 홍콩에 무역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침 화교는 기존 보유하고 있던 중국과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민간 무역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화교는 무역업을 중심으로 경제적 네트워크를 활성화 시켰고, 잡화와 요식업의 성황으로 이어지면서 화교 경제는 다시금 부활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 화교 경영 무역회사 13개사는 홍콩, 상하이, 옌타이(煙臺), 칭다오(靑島) 등지로부터의 생필품 수입을 전담함으로써 한국 전체 수입의 21%를 차지했다. 수출도 16%를 점유했다.5)


그러나 이러한 화교 경제의 부활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다시 약화되기 시작했다. 민족자본의 보호와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80년대 말까지 한국의 역대 정부의 대 화교 정책은 화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 1949년 수입할당 제도 및  ‘외국환 취급 규칙’의 시행, 1957년 ‘무역법’ 공포, 박정희 정부의 화교재산 증식 규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화폐 개혁, 자장면 가격동결, 인정과세의 실시 등 화교의 경제력 성장을 억제하는 조치가 연거푸 이어졌고, 이러한 제한조치들은 한국 화교를 공업과 농업생산에서 퇴출시켰고, 요식업, 여행업 등의 서비스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북미와 호주, 동남아, 대만 등지로 재이주를 한 배경에는 한국 정부의 차별 조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갖는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화교 배척 분위기는 이들의 배타적 민족 정체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류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한국 사회에서 그들만의 ‘외딴 섬’을 만들고, 중화민족의 커뮤니티만을 더욱 강화하는 삶을 살아가게 했다. 한국에서 출생한 2세, 3세 역시 ‘한국 정체성’을 형성시킬 제도적 환경에서 생활하지 못했다. 사회적 제도적 환경이 이들의 중화민족 ‘민족 정체성’과 중화민국(대만) ‘국가 정체성’을 더욱 굳건하게 강화시켰을 뿐, 한국사회에 주동적으로 동화되는 ‘한국 정체성’을 형성시키지 못했다.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양안(兩岸) 간 대립의 역사적 배경은 한국화교의 정체성형성과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6) 동아시아의 이데올로기 대립 국면에서 남한 거주 화교는 중화민국 국적을 소지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산둥 출신인 ‘한국 화교’는 이러한 이유로 고향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지만 국적은 대만(중화민국)이다. 따라서 민족 정체성은 ‘중화민족 정체성’이나, 조국에 대한 정체성은 ‘중화민국’이 당연했다. 특히 중화민국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한국 화교의 중화민국 국가 정체성을 전략적으로 강화시켰고, 화교 사회 역시 각 지역의 ‘화교 협회’와 ‘국민당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중화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중화민국의 반공이데올로기 통합에 적극 참여했다. 비록 고향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고 있는 산둥 지역일지라도 그 국적과 정체성은 중화민국 대만을 향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중화민국 국가 정체성’을 확립시켜 나갔다. 한국 화교는 중화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며 중화민국을 유일한 의탁처로 여겼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후 화교사회는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다.


한중수교와 한국화교 사회의 재구성


한중수교와 이에 따른 대만과의 국교단절, 대만사회의 변화, 중국정부의 적극적 화교정책 등은 한국 화교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1992년 한중 수교는 중화민국과의 국교단절을 수반했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던 한국 화교 사회의 기존 질서가 붕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소외당한 화교들이 의지할 곳은 중화민국이었고, 중화민국은 이러한 화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관리했다. 한중 수교 이후에도 한동안 화교협회와 화교학교 등 화교의 주요 조직들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접촉을 꺼렸다. 중화민국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화교의 중화민국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한국화교의 중화민국 국가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민당이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강조했던 중화민국 체제는 통일을 지향했고, 강한 중화민족 정체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세력들은 통일을 부정했고 심지어 극단에 선 일부는 중화민족 정체성조차 부정하기 시작했다. 대만 사회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소위 ‘대만 의식’과 ‘대만 정체성’이 폭발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 대만독립을 국민투표로 결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UN 재가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동안 간선이었던 총통선거가 직접선거로 바뀌었고, 헌법 수정을 통해 중화민국의 입법원 선거(우리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를 전체 중국이 아닌 대만지역으로 한정했다. ‘대만인에 의한 대만통치’의 기반이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동안 갈등 국면에 있었던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인 ‘신 대만인 정체성’을 강조했고 확산시키고 있다.7) ‘신 대만인 정체성’은 본성인, 외성인이나 원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대만에 거주하는 현재의 대만인이 갖는 정체성이란 의미이다. 대만에서 ‘중화 민족주의’는 이제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강한 중화민족 정체성을 지녔던 한국 화교는 더 이상 ‘중화민국’에 충성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접촉해도 배신이라는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한국 화교’에게 중화민국(대만)은 유일한 중국이었다. 언젠가는 대륙을 통일하여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염원을 실현시켜줄 체제였다. 그러나 민진당 정부의 대만독립 주장은 화교들로 하여금 이러한 염원에 절망을 가져다주었고, 중화민국을 재인식하게 했다. 화교들의 국가 정체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정부의 적극적 화교정책과 한국화교의 다중 정체성 형성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적극적 화교정책은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화교’에게 중화민국 정체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정체성 중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 ‘다중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는 예전과는 달리 화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화교정책으로 선회했다. 성공한 화교를 우선적으로 끌어들여 우호적 세력을 통한 시장경제의 도입과 확산을 도모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외국자본보다는 화교 자본의 유치가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 경제 잠식의 우려를 떨치고 비교적 안전하게 개방의 효과를 취할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의 해외 이주와 관련해서도 적극적 허용과 포섭정책으로 전환하고 소수민족 화교를 ‘화교 정책시스템’에 편입시켰다.8) 이러한 정책 기조를 통해 볼 때, 소수민족 화교를 포함한 해외화교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여러 가지 산하 조직을 통해 한국에서의 친중파 양성과 친중 여론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선족을 포함하여 중국 각 지역에서 한국에 이주 정착한 ‘신 화교’ 뿐만 아니라 산둥 화교인 ‘구 화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무원 산하기관인 화교사무판공실(華僑事務辦公室), 중국평화통일촉진회(中國和平統一促進會),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韓華中國和平統一促進聯合總會),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中國在韓僑民協會總會)가 대표적인 산하 조직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는 2002년 설립되어 구 화교와 신 화교를 모두 아우르는 화교협회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국내 거주 화교 사회를 주도했던 중화민국 계열의 ‘한성 화교협회’가 2003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등록해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중 등록하는 상황도 벌어졌다.9)


‘한국 화교’가 중화인민공화국 관리시스템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소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정체성’이 형성될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 화교'의 ‘중국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증거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중국평화통일촉진회 한국지부인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韓華中國和平統一促進聯合總會)는 2002년 “대만의 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한다.”는 ‘반독촉통(反獨促統)’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한국의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10) 2003년 이후,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했던 한국 화교 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는 반면,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중화민국에 대한 충성도의 변화 배경에는 고향과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의 구축과 고향으로 향한 재이주도 큰 몫을 했다. 산둥 출신이 대부분인 한국 화교는 수교 이후 인천-웨이하이(威海) 간, 부산-옌타이(煙台) 간 정기 선박 항로의 개통과 더불어 소위 ‘보따리 무역’과 포장 사업을 주도했고, 고향을 향한 투자나 자녀의 학업, 노후생활을 위해 재이주하기도 했다. 한중 수교 이전에는 주로 중화민국(대만)과 경제 관계를 형성했지만, 이제는 고향 네트워크를 활용한 출신지역과의 경제관계가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11)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화민국 대만의 정권교체와 독립 지향적 사회변화는 한국 화교들로 하여금 중화민국을 재인식하게 했고, 중화민국의 국가 경계를 초월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관리, 중국이 가져다주는 현실적 이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중화민국 정체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정체성이 혼재하는 ‘다중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화교에 대한 인터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국이요? 대만도 내 조국이고 중국도 내 조국이지요. 내게 유리한 쪽에 서면 되지, 이편저편 가를 것 없어요. 오히려 한국 편이 되는 게 훨씬 현실적이지요.”(류○○, 음식점 경영, 62세)



이충헌(李忠憲) 전 한성화교협회장은 한국 화교들을 "부모만 셋을 둔 고아"에 비유한다. 형식상 모국인 대만이 어머니, 원적이 있는 중국이 아버지라면, 나고 자란 터전인 한국은 양아버지란 뜻이다.12) 한국 화교의 초국가적 다중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한국인 정체성’의 강화


한국 정부의 화교 차별 정책은 이제 철폐되고 완화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 화교의 경제적 성장을 가장 억압했던 제도는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이었으나, 한국 정부는 1998년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규정을 철폐했고, 2002년에는 ‘영주 거주 비자(F5)’ 제도가 신설되었다.13) 한국에서 거주 자격 취득 후 5년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더불어 ‘외국인 등록증’ 제도가 시행되면서 장기 거주 외국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들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1997년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배경도 작용했지만,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비자 정책의 개선과 더불어 외국인에 대한 여러 가지 완화된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한국 화교의 한국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정책변화는 참정권 부여이다. 2005년 한국 정부는 한국 체류 3년 이상의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지방 선거권을 부여했다. 연이어 2006년 5월 지방선거가 실시되었고, 한국 화교는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피선거권은 부여되지 않았지만, 주민대표를 자기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일원이 된 소속감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이방인이 아닌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지방선거 선거권을 부여한다거나 지하철 이용 시 한국 노인과 똑같이 지하철 요금을 면제해 준다던가, 국민건강보험 가입 등의 거주자로서의 혜택이 하나하나 열렸고, 상당 부분 한국 시민과 비슷한 형태의 시민권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지방 선거권을 부여 받은 한국 화교는 “지역 주민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 무척 기쁘다.”, “어제 집으로 배달된 후보들의 선거 공보를 밤늦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며 환영했다.14) 역사상 처음으로 화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2006년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내 최대의 화교촌인 인천 차이나타운 곳곳에 투표권이 주어진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릴 정도로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제 대한민국 시민으로 대접 받는 느낌을 갖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사회공간의 구축과 다중 정체성


한국 정부의 제도적 배려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 역시 대폭 개선되었다. 향후 더욱더 많은 제도적 사회적 장벽이 제거될 것이다. 한국 화교 스스로도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혹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초국가적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화교의 한국 내 정치활동 참여의 공간이 훨씬 확대되었고, 이들의 정치참여 의식 또한 향상되었다. ‘한국 화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배려는 이들의 한국에 대한 국가 정체성의 유지 및 강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나아가 그들이 구축하고 있는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초국가적 사회 공간을 더욱 확장시켜 주었다.


최근의 이주자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가적 사회 공간의 구축을 당연시 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중수교 이후 진입한 ‘신 이민’ 뿐 아니라 ‘구 이민’도 예외가 아니다. 거주국과 모국에 중첩되는 권리를 요구하기도 하고, 양쪽 어디에도 경도되지 않은 모호한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한국 화교 역시 한국에서만 영구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국적국인 중화민국 대만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기도 하고, 일본이나 미국 등지로 재이주 하기도 한다. 한중 수교 이후에는 중국에 거주하기도 한다. 


이들은 거주국에서의 권리를 요구하기도 하고, 이출국 혹은 모국의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도 한다. 북미 거주 한국화교 단체가 미국에서 대만의 민진당 정권 퇴진운동을 전개한 일,  ‘댜오위다오(钓鱼岛) 영토 문제’ 등 애국운동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들이 모국정치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예이다. 초국가적 해외 경제 네트워크 구축과 활용에도 또 하나의 적극적 사회공간 구축의 예이다. 1999년에 설립된 <한국화교경제인협회>와 2004년에 설립된 <한국중화총상회>는 한국 화교 경제인의 발전과 권익을 도모하고 전 세계 화교기업(華商)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2005년 10월 제8차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이나 미국 대만 등지로 재이주한 한국 화교를 연결한 네트워크 역시 중요한 연결기제이다. 이러한 온오프라인 관계 네트워크를 통해 글로벌 중화민족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초국가적 활동공간을 구축하면서 상응되는 ‘다중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주자 개인의 선거참여와 같은 직접적인 정치적 실천, 경제적 네트워크의 구축 외에도, 이주자들은 통상 사회단체를 조직하여 화교사회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중국인’ 의식을 진작시킨다. 한국화교는 본적을 기반으로 하는 동향회관과 거주지를 바탕으로 한 중화상회가 대표적이었는데, 후일 지방적 성격의 회관들이 해체되고 자치조직인 화교협회가 조직되었다. 이중 서울지역을 대표하는 화교협회가 ‘한성 화교협회’이며 현재까지 한국 화교 사회를 대표하는 협회의 하나다. 현재 정식으로 등록된 화교협회는 총36개로15) 여전히 결속력을 유지하는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한국화교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제 영역에서 거주국인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출국인 중국과, 국적국인 대만과, 그리고 재이주한 지역과 깊은 연계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들의 고유 공간인 ‘초국가적 사회 공간’을 구축하면서 초국가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화교’에게서 표출되어지는 ‘다중정체성’은 결코 그들이 주동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주민이 겪어야 하는 시대와 환경의 결과물로 인정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의 격변했던 시대적 환경적 조건이 이들의 정체성을 결정했다. 때로는 한국인으로서, 때로는 대만인으로서, 때로는 중국인으로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들만의 고유한 초국가적 활동공간과 다중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바라볼 때, 단일 정체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역사가 만들어 낸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초국가적 활동 공간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가진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다는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한국의 발전에서 뿐 아니라, 한중 양국관계 및 한국과 대만 양국관계의 상생적 발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사회적 자산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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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양필승, <한국 화교의 어제, 오늘 및 내일 -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맞이하여>, ≪국제인권법≫ 제3권, 2000, 148-149쪽.

2)1931년 7월 만주의 길림성 장춘현 소재 만보산(萬寶山)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별한 인명피해는 없는 단순한 충돌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천에서 조선인과 화교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충돌은 조선 각지로 퍼져 결국 수많은 화교가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화교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사태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준식, <만보산 사건과 중국인의 조선 인식>, ≪한국사연구≫ 156집, 2012, 237쪽.

3)최병도, <만보산 사건 직후 화교 배척 사건에 대한 일제의 대응>, ≪한국사 연구≫ 156집, 2012, 323-324쪽.

4)왕언메이, <해방 70년, 한국 화교에 대한 이해>, ≪역사비평≫, 115호, 2016, 303쪽.

5)<한국의 오랜 이방인, 화교의 어제와 오늘>, 신동아(2018.5.9.) https://v.daum.net/v/ocEVymWVYM (검색일: 2024.08.12.)

6)중화민국은 1912년 중국 남경에서 건국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북경에서 건국함. 각자 자신이 주체가 되는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면서 대표성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양국관계라 칭하지 않고 양안관계라 칭함.

7)400여년 전 대만에 이주 정착하여 세대를 거듭하여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단을 대만성 본성 사람이라 하여 본성인(本省人)이라 칭하고, 장제스 정권의 대만 천도를 따라 대만에 이주 정착한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칭함. 한동안 본성인과 외성인 간 갈등과 충돌이 있었으나 현재는 종족간 갈등을 초월한 신 시대 아이덴티티로서 ‘신대만인’을 주창하며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8)丁宏,李如東,郝時遠, <國家社科基金重大項目‘少數民族海外華人硏究’ 開題實錄>, ≪廣西民族大學學報≫ 第6期, 2015; 최승현, <당대 중국의 ‘소수민족 화교 화인’ 연구 및 정책 흐름 분석>, ≪중국 지식네트워크≫ 16, 2020, 5-36쪽.

9)왕언메이, 2016, 앞의 논문, 307쪽.

10)<중국 공산당 통일전선 기구 국내 조직 산파...친중 화교 사회 대부 한성호>, THE EPOCH TIMES(2021.11.16)

11)중국 측의 수출입과 관세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2000년 이후 보따리 무역은 다소 쇠퇴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1,000여 명이 보따리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왕언메이, 2016, 앞의 논문, 308쪽에서 재인용.

12)<한국의 오랜 이방인, 화교의 어제와 오늘>, 신동아(2018.5.9.),

 https://v.daum.net/v/ocEVymWVYM (검색일: 2024.08.12.)

13)1998년 외국인 토지법이 전면 개정되어 ‘외국법인’은 용도 및 면적에 제한 없이 국내법인과 동일하게 토지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고, ‘외국인 개인’은 국내에 거주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땅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매매계약도 신고만으로 그쳤다. 왕언메이, 2016, 앞의 논문, 312쪽.

14)<사상 첫 투표권 얻은 화교들…“진짜 한국국민 된 느낌”>(한겨레, 2006.5.26.)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7008.html(검색일: 2024.08.08.)

15)김혜련, 여병창, <한국 화교의 디아스포라적 다중정체성 고찰>, ≪국제언어문학≫ 제25호, 2012,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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