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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세미나]중국인들은 왜 징강산(井岡山)에 오를까

박진희 소속/직책 : KIEP 중국 권역별 성별 연구팀 연구원 2011-07-12

    7월 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기념일입니다. 특히 올해는 창당 90주년이 되는 해로, 전국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열리고 주요 혁명 유적지에는 방문객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여러 혁명 유적지 중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은 곳은 징강산(井岡山)이었다고 합니다. 황산(黃山), 태산(泰山)과 달리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한 징강산은 어떻게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혁명 유적지가 되었을까요?


‘징강산’ 이름의 유래

    징강산은 장시(江西)성 서남부에 있는 해발고도 1,597.6m의 산입니다. 후난(湖南)성과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고 산세가 험준하여 예로부터 정부의 관할이 잘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토적들과 전란을 피해 이주한 객가인(客家人)들의 주요 은신처가 되었죠.
 

  그림 1. 징강산의 풍광

 

    
    징강산이라는 이름 역시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청(淸) 초 전란을 피해 내려온 객가인들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우물과 같은 형태를 가진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마을 앞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죠. 그래서 그들은 ‘우물’과 ‘시냇물’에서 글자를 따와 그 곳을 ‘징장(井江)산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객가어의 ‘장(江)’과 ‘강(崗)’의 발음이 같아 마을 이름이 점점 ‘징강(井崗)산촌’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후에 또 바뀌어 ‘징강(井岡)산촌’이 되었습니다. 산 이름 역시 마을 이름을 따라 지금의 ‘징강산(井岡山)’이 되었구요.


마오쩌둥(毛澤東)과 징강산

   1927년 10월, 중국혁명사상 가장 유명한 이가 징강산에 당도합니다. 바로 서른 네 살의 마오쩌둥이었습니다. 제1차 국공합작의 붕괴 후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일으킨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천연의 요새인 징강산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주더(朱德)와 합류해 잔여 병력을 ‘홍군 제4군’으로 재편하고 국민당의 공격에 맞섭니다.
         

 그림 2. 징강산의 주더와 마오쩌둥

출처: www.image.baidu.com


    국민당과의 치열했던 전투는 마오쩌둥이 징강산에서 지은 시 ‘서강월·징강산(西江月·井岡山)’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3.  왼편 시가 적힌 부채(징강산 관광상품)

 

   징강산에서 벌어진 전투가 이 시처럼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홍군은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얻지 못했고 주더의 아내 등 많은 이들이 전사했죠. 국민당의 공격은 갈수록 거세어져, 결국 마오쩌둥과 주더는 1929년에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에서 나와 장시성 남부의 루이진(瑞金)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중국혁명의 요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강산은 ‘중국혁명의 요람’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중국 특색의 혁명 노선-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혁명전략-이 곳에서 싹을 틔웠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노선에 따라 대도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창사(도시)에서의 봉기 실패와 징강산(농촌)에서의 생활을 통해 중국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즉, 대도시와 달리 국민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농촌 지역에서 홍군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과 군이 단단히 결속된 홍색정권을 수립한 후, 혁명을 도시와 전국으로 파급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마오쩌둥은 징강산에서 홍군을 ‘인민의 군대’로 육성하고, ‘징강산 토지법’을 제정하여 중국공산당 최초로 토지혁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농민들의 혁명적 에너지를 끌어 모아 중국공산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죠. 마오쩌둥의 이러한 노력은 중국공산당 혁명이 성공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홍색관광’ 러쉬

    이러한 역사적 의의로 인해 중국인들은 징강산에 오릅니다.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난국에 부딪혔을 때 혁명정신을 되새기고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징강산을 방문합니다. 마오쩌둥 본인 역시 1965년에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사를 앞두고 징강산에 다시 올랐고, 가깝게는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주석이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9년 춘제(春節)에 징강산을 방문했습니다.    

 

    그림 4. 징강산을 방문한 마오쩌둥과 후진타오


 

    최근 홍색관광이 유행하면서 대표적인 홍색관광지인 징강산의 관광객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0년 사이 관광객 수가 20배 이상 증가하였고, 2010년의 관광수입은 30억 위안을 초과했다고 합니다. 이는 징강산 지역 GDP의 50%를 상회하는 액수에요. 

    홍색관광은 왜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을까요? 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관광에 필요한 재정적·시간적 여유가 중국 국민들에게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정부의 의도에 의한 면이 큽니다. 중국 정부는 공산당 혁명지에 배어있는 영웅주의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관광객들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어해요. 이를 통해 난세로부터 중국을 구하고 신중국을 설립한 공산당의 정통성을 강조하여, 세계화와 개방의 물결 속에 날로 희박해지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증진하기 위함이죠.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홍색관광지의 인프라 구축 및 관광 프로그램 개발에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어요. 징강산만 하더라도 1997년에 ‘애국주의 교육 시범기지’로 지정되어 징강산혁명박물관 신관 등이 증설되고, 2004년부터는 군용 공항이었던 징강산공항이 일반시민에게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와 철도 노선도 뒤따라 증설됨으로써 관광이 용이해졌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인 올해 상반기에는 벌써 작년 동기대비 74% 증가한 관광객이 징강산을 방문했다고 하니, 홍색관광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농촌혁명의 근거지로 고생했던 과거를 보상받는 느낌이네요. 이 열기에 동참하고 싶으신가요? 1999년에 발행이 중지된 인민폐 구권을 가지고 있다면, 중국혁명이 어떤 풍광 속에서 탄생했는지 집에서도 편안히 살펴볼 수 있답니다.
 

그림 4. 인민폐 100위안 구권 뒷면

출처: www.image.baidu.com


 

[참고자료: 「중국혁명사」(서진영), China Daily, 人民網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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