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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와 21세기 한중일 관계

이원봉 소속/직책 : 경희사이버대학교 중국학과 / 학과장,교수 2014-04-24

2013년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에 새로운 지도체제가 출범하면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가운데 새로운 국면을 맞기 시작하였다. 우선 새로이 등장한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우경화된 국수주의를 강화하면서 한국과 중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주의를 경험하였던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베 내각은 과거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가운데 위안부문제와 역사교과서문제를 심하게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한국의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과는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를 놓고 영유권 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아베 내각은 역사왜곡과 더불어 미일동맹을 배경으로 자위대의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 일본이 한반도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중국의 만주를 불법으로 침략했던 과거의 역사가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에 한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처사에 대해 심히 우려하는 가운데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 6월 28일 중국을 방문하였던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회담 자리에서 과거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사형당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해 중국의 하얼빈역에 비석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일본의 새로운 도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공동 대처하자는 의미에서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이는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한중 간의 협력과 대응의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정책적인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한국인들 모두는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그리고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장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중국 사람들도 자국인이 아니지만 안의사의 의롭고 장렬한 순국정신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있다. 2014년 초 중국정부가 하얼빈시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의사이다. 또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는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에 대해 일본정부는 비판하고 나섰다.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일방적인 평가를 토대로 한국과 중국이 연대해 국제적으로 전개하는 움직임은 평화와 안정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국과 중국을 동시에 비판하고,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재차 주장하였다. 기념관 건립이 평화를 저해하며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일본 지도자들의 언급을 통해 일본의 역사인식과 양심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이 말한대로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인가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안중근 의사가 어떤 환경에서 활동을 했던 인사인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안의사는 동북아시아가 요동치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79년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탈하기 위해 조선의 개국을 강요한 1876년 강화도조약 3년 후이다. 안의사는 개화적 사상을 지닌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안의사가 성장할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은 1895년 조선의 국모인 민비를 시해하였던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던 시기이다. 을사조약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1907년 고종은 네델란드 헤이그 국제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탈에 의해 맺어진 조약임을 만국에 알렸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다. 조국이 일본에 의해 강탈되고 국왕이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던 시기에 애국사상에 투철하였던 안의사는 1907년부터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활동하였던 당시 아시아는 서구세력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주의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시아의 맹주이었던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바로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과거 중국의 영광과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반식지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은 서구 국가들로부터 국권을 수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전혀 달랐다. 1868년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그 결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국주의국가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아시아의 운명은 이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위협을 받는 위기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아시아에서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도모하였으며 그 결과 한반도와 만주는 일본에 의해 점령된 것이다. 바로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말한다. 러일전쟁의 경우는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하였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이는 21세기  미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 현 시점에 시사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한 일본 군국주의는 결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고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에 희생된 아시아에서 가장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의병활동은 일본의 침략이 도를 넘어섰던 을미사변이 있었던 189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크게 확대되었다. 과거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자발적으로 궐기한 조선의 의병들이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바쳐 왜군들과 결연히 싸웠듯이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대한제국의 의병들은 결연히 궐기하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의병이지 테러리스트와 같은 폭도는 아니었다. 한국의 의병들이 결연히 궐기하자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일본군들은 의병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살육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해 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일본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의병들은 포기하지 않고 만주지역과 연해주로 이동해 활동하였다. 이 시기부터 의병들은 더욱 조직적인 무장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애국사상이 투철한 안의사도 이 시기에 연해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은 1908년 당시 두 차례의 국내 진공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1909년 안의사에게 희소식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1909년 10월 중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었다. 의병 참모중장의 지위에 있었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안의사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방법을 모색하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뛰어난 명사수였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놓칠 리 없었다.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에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킨 안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체포되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었고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였던 이토는 안의사의 단죄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의로운 거사를 감행한 안의사를 누가 테러리스트라 할 수 있는가? 안의사가 테러리스트라면 당시 독립군 모두 테러리스란 말인가? 이는 오직 일본의 극우주의자들만이 주장하는 억측이라고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체포된 직후에서 1910년 사형을 집행 당하기 전 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안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침략행위를 중지해야만 아시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협력해야지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침략의 만행을 중지할 것을 경고하는 선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안의사가 강조하는 것은 서구의 간섭이나 압력에서 벗어나 동양 3국간의 진정한 협력과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21세기 한, 중, 일 관계에도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주는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 국제사회는 물론 아시아에도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21세기 현재 아시아의 정세는 평화 속에 긴장이 고조되는 격동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초 현재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따른 중국과 미국과의 갈등, 북한의 핵개발문제, 동아시아에서의 영토분쟁, 일본의 군사력 증강 등과 같은 새로운 위협적인 요인들이 부상하고 있고 이에 따라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급부상과 이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그 결과 중국은 미국 다음가는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G-2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한 중국에 대해 미국은 미일동맹을 통해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핵개발도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에 큰 위협적인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토분쟁을 둘러싼 한국, 중국, 일본 간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정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는 미일동맹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일본 외교안보전문가 마고사키 우케루(孫岐亨)의 ‘소설 외무성-센카쿠문제의 정체’라는 책에서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일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미국의 의중을 언급하였다. 센카쿠열도는 1972년 중국과 일본 간 수교 당시 양국의 지도자들은 영유권 논쟁을 유보한 바 있다. 그 후 중국과 일본은 영유권에 대해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9년 미국이 일본을 부추켜 영유권 분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일본의 ‘중국공포증’과 일본의 대미의존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미일동맹으로 중국을 견제해온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세기 간의 차이는 있으나 20세기 초와 21세기 초 일본의 군사력 증강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0세기 초의 경우, 1902년 영일동맹은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유도한 바 있다. 21세기 초의 경우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배경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는 물론 21세기 초 현재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일본의 국수주의체제의 강화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미래 아시아 평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같은 추세가 더욱 강화되면 아시아의 평화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국수주의와 역사왜곡을 막기 위한 한중간의 협력에는 진정성이 더 필요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에게 중국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더하게 할 뿐이다. 만주지역의 간도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일방적인 합의하에 넘겨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의 고대사마저도 중국화 하는 절차를 밟아 왔다. 오래전부터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위협하는 침략행위를 해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와 현재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진정한 동양의 평화는 도래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의 평화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진정한 협력과 평화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21세기 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방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동양평화론’은 100년 전의 사상이지만 현재에도 살아 있는 시간을 앞선 위대한 사상이라 할 것이다.
 
 

※원문은 첨부파일을 참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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