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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무갈 제국을 계승한 파키스탄

파키스탄 신규섭 한국외대 중앙아시아 연구소 연구교수 2012/07/23

자료인용안내

자료를 인용, 보도하시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 AIF 인도ㆍ남아시아 ”로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이슬람이라고 할 때 대체로 아랍과 동일시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구수로 볼 때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로 이어지는 북인도 지대에는 5억 이상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1857년 무갈 제국이 영국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파키스탄의 무슬림 세력은 중세 수 세기 동안 힌두 세력을 지배했다. 그러나 영국이 힌두 세력과 밀착함으로써 무슬림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파키스탄 지역은 고대 인더스 문명의 주역으로 이란과 더불어 페르시아 문명권의 핵심 국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파키스탄(인도) 지역에 영국이 등장함으로써 이란과 파키스탄의 관계를 단절시킴과 동시에 중세를 통해 지배 계층으로서 군림했던 무슬림 세력은 그 지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파키스탄의 무슬림 세력이 인도에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키스탄 지역은 고대부터 페르시아 권 국가들과 역사, 문화적으로 궤를 같이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역사가 왜곡되어 학문적으로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1947년 독립과 함께 주어진 명칭이며 독립 이전에는 인도 무슬림으로 불렸다. 네루와 지나(파키스탄의 성립자)간의 회의석상에서 지나가 내각을 비롯해 무슬림 세력의 지분으로 1/4를 주장했다는 것은 힌두와 무슬림들의 인구 비례를 감안할 때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물론 이 타협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파키스탄은 독립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 파키스탄(인도) 지역의 유명한 개혁 사상가로는 세예드 아흐마드 칸(Syed Ahmad Khan, 1817-1898)과 모함마드 이크발(1877-1938)을 들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 위대한 제국, 무갈 왕조는 서서히 저물어갔다. 무갈 제국의 왕족은 티무르 후손의 투르크계였지만 귀족계층으로 대변되는 지배세력은 지금의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세력이었다. 세예드 아흐마드 칸의 출생 시기는 유명무실한 무갈 제국의 왕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1857년 자유를 위한 독립 투쟁이 영국에 의해 처음에는 세포이(페르시아어로 병사) 반란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세포이 항쟁은 무슬림들의 좌절과 절망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자유를 위한 마지막 투쟁이었다. 이 독립 투쟁을 결정하고 감행한 것은 인도 무슬림들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는 영국 지배자들의 반 무슬림적인 태도와 친 힌두적인 태도, 영국정부의 억압적인 통치 단계로의 진입, 경제적인 쇠퇴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인도 무슬림들이 혁명의 횃불을 들어 올려 파키스탄이라는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물론 힌두 세력도 이 투쟁의 대열에 참여했지만, 이 역사적인 투쟁에는 인도 무슬림들의 좌절과 무기력, 정치적 자유와 이슬람 문화의 부흥을 향한 열망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무갈 왕조가 침몰해 가는 동안 무슬림들의 학문, 문화, 지위도 서서히 해체되었다.

 

아흐마드 칸은 극단적인 좌절과 무기력에 빠진 인도 무슬림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1857년 항쟁의 슬픈 역사는 상당 기간 인도 무슬림들의 마음속에 사무쳤던 울분의 폭발이었다. 아흐마드 칸은 무슬림들의 자유와 독립 쟁취의 역사에 관해 최초로 서술한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아흐마드 칸은 암울했던 시절의 민초들에 대한 일화들을 연속적으로 발간했다. 그는 인도의 사회-정치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1858년 무라더버드에 근대사를 전공하는 학교를 개설했다. 아흐마드 칸은 무슬림들의 교육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인도의 개혁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여기서 교육이란 근대 과학과 예술을 의미한다. 그는 가지푸르에 있는 번역원장으로 취임했고 이는 알리가르의 '과학 소사이어티'를 발전시키려는 의도였다. '번역 소사이어티'의 역할은 문학과 예술의 주요 서적을 우르두(파키스탄의 국어)어로 번역함으로써 영어를 모르는 인도인들에게 근대 사상을 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우르두어가 무갈 제국을 특징짓는 언어로서 통합된 문화의 실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때까지 인도 북부에서 무슬림들과 힌두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언어는 페르시아어였다. 그는 가지푸르에 있는 '번역 소사이어티'와 알리가르에 있는 '과학 소사이어티'를 통해 우르두어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자극을 가함으로써 그리스, 중국, 인도, 이집트의 역사, 정치경제, 측량법, 삼각법, 대수학, 기하학, 미적분학, 기술 서적 등을 번역하는 요람으로 성장시켰다.

 

1867년 아흐마드 칸은 처음으로 우르두어를 매개어로 하는 대학의 설립에 관해 총독에게 전문을 보내 의제로 삼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1875년에 현재의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의 전신인 앵글로 모함마단 오리엔탈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1886년을 기점으로 아흐마드 칸은 사회적, 종교적 개혁가로 변신한다. 이런 정치적인 운동은 무슬림들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흔히 '알리가르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알리가르는 인도의 이슬람 문화와 무슬림 교육의 중심지였다. 아흐마드 칸 이후 모함마드 이크발은 자말루딘 아프가니와 무함마드 압두처럼 이슬람 사상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서구 문물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흐마드 칸은 이슬람이 근대 과학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도 무슬림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힌두 세력으로 인해 아흐마드 칸은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언급한 다른 개혁사상가들과 같이 서구의 근대 과학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슬람의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인물로 아흐마드 칸을 꼽을 수 있다.  

 

아흐마드 칸 이후 중동과 서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 개혁운동은 20세기 이슬람권 최고의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모함마드 이크발(Mohammad Iqbal, 1877-1938)로 이어진다. 이크발이 태어난 시기는 인도 무슬림들에게는 혼돈의 시대로 정치적 이행기에 놓여 있었고 무갈 제국(1526-1857)이 멸망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무갈 제국의 멸망은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뿌리내렸던 페르시아어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크발의 시대는 서구 식민주의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가치가 실종된 살상과 파괴의 시기였다. 영국의 침략은 중세 페르시아권의 양대 국가, 페르시아와 무갈 제국 즉 이란과 파키스탄(인도 무슬림) 간의 관계를 이간시키면서 파키스탄과 인도 지역에서 무슬림 통치를 끝내고자 하는 계략을 갖고 있었다. 고대 이후 페르시아와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궤를 같이해 왔던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인도 무슬림들은 페르시아와의 결별 이후 절망 속에 자신감을 잃고 있을 때 또 한 차례 이슬람의 개혁운동을 부르짖으며 등장한 이가 동방의 시인으로 알려진 모함마드 이크발이었다.

 

페르시아어와 우르두어 시로 풀어내는 이크발의 심성론은 참으로 그 깊이가 깊고 오묘하며, 그의 사상의 핵심 요체로서 서구에서는 자아 론으로 불린다. 그의 사상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반 식민주의와 반서구주의로 연결된다. 그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난하면서 서양의 착취와 수탈에 대항하고 있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 거부 론과 더불어 테헤란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국가 통합론을 제시한다. 그는 이란이 국제 무슬림 연맹의 추축(樞軸)을 차지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19세기는 민족주의가 승리한 세기였다. 민족주의는 유럽의 정치 지도에서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융기를 기독교의 맥락에서 당연한 진전이라 간주했다. 그는 위조된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움마(이슬람 공동체) 개념이 민족주의보다도 훨씬 더 웅장한 개념이라는 확신을 무슬림들에게 불어넣어 줌으로써 현대 이슬람 사상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무슬림 세계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이란이 무슬림 국가의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담당해주기를 기대했다. 물론 이크발은 당시 이란의 정치적 상황을 아쉬워했고 그 질곡에서 헤어나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20세기 이슬람권 최고의 사상가중 한 사람인 모함마드 이크발의 이런 관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페르시아 권 국가들이 이슬람 시대의 도래 이후, 셈족의 아랍 이슬람교를 외래 종교로서 받아들였지만 이슬람교가 출현하기 전부터 오랜 기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정신문화가 이 지역의 사상과 철학을 지배해 왔음을 이크발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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